신간 '소리의 과학'

눈은 속여도 귀는 못 속인다…청각의 진화생물학

신간 '소리의 과학'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밑장을 빼면, 소리가 달라 소리가."

잘 만들고 흥행에도 성공한 영화 '타짜'의 결정적 대사다.

도박계 전설로 통하는 평경장이 화투를 치면서 '밑장빼기' 기술로 섣불리 자신을 속이려 한 고니에게 한 말이다. 고니는 나중에 스승의 이런 가르침을 역이용한 고도의 심리전으로 악당 아귀를 제압한다.

이 영화에선 이런 대사도 반복된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

정리하면, 타짜의 속임수는 눈으로 봐선 알 수 없을 만큼 재빠르지만 귀까지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을 믿는 건 하수들이고 귀를 쓰는 건 아무나 못 하는 고수들의 몫이다.

실없는 얘기가 아니다. 여기엔 예사롭지 않은 과학적 통찰이 있다.

신간 '소리의 과학'(에이도스 펴냄)은 인간이 시각이란 편견에 갇힌 존재라는 것과 세상은 그런 인간이 보고 안다고 믿는 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복잡한 곳일 수 있음을 일깨운다.

풀어놓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쫓다 보면, 시각을 능가하는 청각의 뛰어난 기능적 역할은 물론 인류가 생존하고 진화하는 데 그리고 지금과 같은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되는 데 소리와 청각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과학자이자 음향전문가, 음악가인 세스 S. 호로비츠로 미국 브라운대학교 신경과학과에서 동물행동, 신경과학, 청각의 생물학 등을 가르쳤다.

인간을 흔히 시각적 동물이라고 한다.

오감 중 시각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까마득한 조상 때부터 주로 낮에 훤한 들판에서 사냥과 채집을 하며 살아왔던 것과 관련이 깊다.

덕분에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시각을 중심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시각적 정보를 토대로 파악하고 재구성한 세계를 전부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책은 시각보다는 오히려 청각이 더욱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감각이라고 설파한다.

이때 청각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 것만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청각은 몸 주위에서 일어나는 유체의 운동을 탐지해내는 감각이다. 인간의 귀는 물고기의 몸에 있는 측선(옆줄)과 마찬가지다. 귀는 대기 중의 질소나 산소 분자를 감지하지만, 측선은 물 분자를 감지한다.

공기 분자의 움직임을 느끼는 귓속의 유모세포는 빛을 감지하는 기관이 출현하기 전인 대략 15억 년 전 다세포 생명체의 섬모에서 진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물은 저마다 특출난 감각이 있는데 간혹 인간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감각을 가진 동물도 있다. 돌고래나 고래, 박쥐는 초음파를 송수신할 수 있고, 벌 같은 곤충은 자외선을, 상어나 가오리는 전기를, 철새나 나비, 바다거북, 박테리아는 자기장을 감지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서식 환경에 따라선 시각이나 후각, 미각, 촉각이 아예 없거나 인간보다 훨씬 제한적인 동물도 많다. 하지만 청각이 없는 귀머거리 동물은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감각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각자 처한 환경에 따라 필수불가결한 생존 수단으로서 진화한 것이다. 모든 동물이 청각을 가졌다는 건 그 어떤 환경에서든 그만큼 유용하게 쓰인다는 뜻이며, 생존에 필요한 정보로서 소리의 가치가 그만큼 보편적이고 크다는 것을 의미이기도 하다.

청각은 기능상 시각보다 뛰어나다. 빛의 속도(초속 30만㎞)는 공기 중의 소리 속도(초속 340m)보다 88만 배 이상 빠르다. 이 때문에 감각의 반응 면에서도 시각이 청각보다 빠를 것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청각이 시각보다 훨씬 빠르고 정교하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뇌는 시각적 정보의 경우 초당 15~25번의 변화만 인식할 수 있지만, 청각적 정보는 초당 200회 이상의 변화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타짜의 밑장빼기를 눈으론 알 수 없어도 귀로는 알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청각은 생존과 관련이 깊은 만큼 인간이나 다른 동물들의 심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리가 주의집중이나 감정, 특히 두려움이라는 원시적 감정과 깊이 연결돼 있다는 것이 여러 연구 결과 확인됐다. 사람이나 동물들이 큰 소리를 무서워하고 예상치 못한 소리에 깜짝 놀라는 이유다. 이처럼 긴장을 조성하는 소리는 인류의 조상이나 동물들에게 생명을 위협하는 적의 존재를 알려주는 신호로 해석된다.

청각은 24시간 돌아가는 경보시스템 역할을 한다. 잠귀가 밝은 사람이든 어두운 사람이든, 청각은 잠들었을 때도 유일하게 작동하는 감각이다.

게다가 시각은 빛이 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일치시켜야만 제 기능을 하는 제약이 있지만, 움직이지 않고도 사방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각은 그런 제약이 없다.

이런 기능적 효용 덕분에 청각은 인간과 동물이 위대한 진화적 도약을 하는 데 지렛대가 됐다. 소리가 위험을 알리는 수동적인 신호에 그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동종 개체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하는 능동적인 수단이 된 것이다.

동물이 소리를 만드는 방법은 여러 수백가지다. 성대처럼 호흡기 일부를 변형시킨 기관으로 공기의 흐름을 조절해 소리를 내는 건 인간을 포함한 육상 척추동물들이 공유하는 특성일 뿐이다.

서식 환경에 맞춰 상상 이상의 기발한 방법으로 소리를 내는 동물들이 많다. 청어는 항문에서 방출하는 기포로 초음파를 발생시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아귀는 소리내기용 근육으로 부레를 문지르고, 대하는 더듬이 끝 부분을 눈 주위 껍질에 문질러 바이올린 소리를 낸다.

소리를 많이 낼수록 동물들의 행동은 복잡해지고 사회성은 강화됐다.

책은 시각적 묘사에 치중된 익숙한 지구의 역사와 풍경마저 소리와 청각에 맞춰 재조명한다. 책이 주는 청각에 대한 색다른 깨달음은 시각에 경도된 우리의 세계관과 자기 혹은 인간 중심적 사고체계를 흔들어 놓을 만하다.

저자는 청각을 비롯한 감각 활동을 에너지를 이용한 능동적 활동이란 점에서 '정신물리학'이라 칭한다.

"정신물리학은 물리학의 사적인 재구성이며 진화와 발달을 거치면서 변화한다. 이런 까닭에 열댓 마리 박쥐들이 곤충을 사냥하느라 지하철 소음 수준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도, 우리는 박쥐가 내는 소리의 주파수를 들을 수 없다. 덕분에 여름밤 베란다에서 앉아 시골이 얼마나 조용하냐고 감탄할 수 있다.

노태복 옮김. 400쪽. 2만2천원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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