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관 청주의료원장
[목요세평]

수능시험이 실시되던 지난 11월 23일, 청주에 첫 눈이 내렸다. 원장실 창 밖으로 한 두 송이 내리던 눈은 금세 쏟아지는 함박눈으로 변했다. 오래 전에는 첫 눈 내리는 날은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고, 최근까지도 휴대폰에 문자 몇 개씩은 왔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없지만 그냥 눈이 좋아 구경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릴 적 눈이 올 때면 마당에서 개가 껑충껑충 뛰며 좋아하는 것도 보았고, 장독대에 가지런한 독과 항아리 위에 소담히 쌓여 얹혀있던 눈도 생각났다. 초가지붕 위 두툼히 쌓여 있던 눈은 이불을 연상시켰다. 쌓인 눈을 밟으며 걸을 때 듣는 뽀드득 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정겹다.

내리는 첫 눈이 상서로운 눈이기를 바랐다. 특별히 그 시각, 수능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에게 그렇기를 바랐다. 12년 이상의 공부가 단 하루에 치러지는 이 시험으로 평가되고 또 그 평가가 대학입시는 물론 그들의 삶에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첫 눈 내리는 것을 보며 응급실이 많이 바빠지지 않기를 바랐다. 눈이 내리면 골절 환자가 응급실을 많이 찾는다는 경험 때문이다. 특히 어르신들께서는 이런 날 외출을 안 하시길 바란다. 나이 들면 뼈도 약해지고 또 몸의 균형을 잡는 능력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집 주변에 쌓인 눈을 책임지고 치우는 것도 꼭 해야 할 일이다. 예방의 중요성 때문이다.

첫 눈이 바람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하겠지만, 그래도 첫 눈을 보며 몇 가지 바람을 꼽아봤다. 첫 눈으로 직원이나 환자들의 기분이 조금은 좋아진 분위기인데 외래 한 쪽 구석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조금 전 퇴원 수속을 마친 환자인데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더니 '집에 갈 택시비가 없는데 돈 좀 주세요'라고 한다.

옆에 있던 직원이 주면 안 된다고 귀띔한다. '돈이 없는데요' 하니까 '원장이 돈도 없어요!' 하고 소리를 지르고 간다. 주지 말라고 한 직원에게 알아보니 알코올 중독 환자인데 매번 반복되는 행태라고 한다. 돈을 주면 집에는 가지 않고 술 사먹고 다시 온다고 한다. 도와주지 못해 마음이 편치 않은데 그 사연을 듣고는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가난, 알코올 중독, 입원·퇴원의 고리를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나를 생각하며 하루 빨리 이런 문제가 해결되기를 소망해본다.

첫 눈 오기 하루 전 날 밤에는 정신과 환자 보호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환자가 병원에서는 좋아지는데 퇴원하면 약을 먹지 않고 시간이 좀 지나면 폭력 등의 행동이 재발된다고 한다. 학교 후배인 보호자는 하소연한다.

'선배님,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정말 제가 죽고 싶어요'하는 말소리는 울음소리로 바뀐다. 진정하라며 이 얘기 저 얘기 해 주지만 그 보호자의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어려운 환자의 효과적인 관리, 거기에는 환자, 보호자, 의사 모두의 배려와 헌신 그리고 지시에 따라줌이 필요하다. 모든 의사들의 바람이다.

쏟아지던 첫 눈이 바로 그쳤음을 확인하고 병실에 입원 중인 지인을 찾았다. 갑작스런 심장 정지와 그에 따른 뇌손상으로 식물인간 상태로 입원 중인 환자다. 간호할 보호자가 없어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있는 상태로 오랫동안 입원하다 보니 경제적인 문제가 따를 수밖에 없다. 가끔가다 보호자를 만나면 그래도 웃는 낯으로 인사를 나누기는 하지만 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을 그 분의 가슴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너무 큰 바람일까?

살면서 병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고령화 시대에 환자를 돌보는 의료인들은 더 무거워진 짐을 실감한다. 그런 속에서도 묵묵히 일하는 의료인들에 대한 바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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