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필 청주 청북교회 목사
[투데이포럼]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그랬는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로 '잘' 살고 싶었다. 잘 산다는 친구 집에 놀러 가면 그 집에 있는 장난감이나 가전제품들이 신기했고, 부모님이 외국 출장 다녀오시면서 사다줬다는 이국적인 물건들을 보면 부러워서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었다. 많은 것이 부족했던 집이 창피했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남부럽지 않게' 잘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자라면서 신앙을 갖게 되고, 목회자가 될 꿈을 키워가면서부터는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 국민은 잘 산다는 개념을 물질 소유의 가치기준에서 판단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잘 산다는 것을 남이 봐줘야 할 것으로 여겨, 누군지도 알 수 없는 그 남을 의식해 '남 부럽지 않게' 사는 것을 잘 사는 것으로 규정해버린다.

잘 사는 것은 행복과 필연적으로 연관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삶에 상관하지 않고 물질적인 요소만 풍부하게 갖추면 잘 사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것을 갖고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 소유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조금 모자란 생활을 하더라도 가정이 화목하고 가족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잘 사는 것 아니겠는가. 성경에서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진수성찬 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 아픔이 더 큰 불행이 된다. 잘 산다는 것은 '소유'의 문제도 아니고, '남'이 부럽다며 봐줘야 하는 문제도 아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외국에서 살 때 불편한 요소들이 여러 가지가 있었다. 언어의 불편함, 외로움, 타 문화에 적응하면서 사는 긴장감, 가족들이 아플 때 병원에 가는 일 등이 마음을 힘들게 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넘어서는 행복한 마음이 더 많다. 국제적인 도시에 산다는 자부심, 새로운 문화와 언어를 습득해가는 즐거움 등도 좋지만 정말 마음을 편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요소는 따로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당연히 맺고 살아야 하는 인간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는 독립성이 보장돼 좋았고, 한국 뉴스를 보지 않는 즐거움과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의도적으로 검색하기 전에는 굳이 얽히지 않는 편안함이 있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비교하지 않아 좋고, 지나치게 물질의 소유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서 좋았다.

우리나라는 다양한 상황들이 스트레스를 가중시켜 영혼과 정신을 피폐하게 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 정치적인 갈등은 말할 것도 없고, 관심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나치게 사생활에 간섭하고, 바쁘게 뛰어야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삭막한 압박에 눌려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잘사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돈에 집착한 배금주의에 함몰된 우리의 정신은 행복의 의미를 놓쳤고, 남과 얽혀서 비교의식에 빠져 무엇이 잘사는 것인지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고 했다. 어느 때인가부터 우리는 '휘게 라이프(Hygge Life)'라는 덴마크인들의 삶의 스타일에 열광하고 있다. 소박하고 편안하고 아득한 상태에서 느끼는 행복한 삶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일상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누리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살면 잘사는 것이라고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나의 삶은 그리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현한다. 잘산다는 것은 행복과 관련이 있다. 소유와 비교에 집착하느라 행복을 잃지 말고 나만의 만족과 기쁨을 찾아 소박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추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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