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충남 출신으로는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기정 할머니가 1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1943년 꽃다운 나이 18세 때 일본군에 끌려가 싱가포르·미얀마 등지에서 파란만장한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일본군의 성적 노예 생활은 말로 형언키 어려울 만큼 치욕스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평생 악몽 속에 시달려야했지만 그 누구도 사죄하지 않았다.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안고 스러져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끝내 풀어드리지 못한 우리로서는 낯부끄럽다.

이 할머니는 해방이 되자 군함을 타고 부산을 통해 귀국했지만 생활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지만 불임증으로 자식을 낳을 수가 없었다. 위안부 생활의 후유증이었다. 그때의 상흔을 천형(天刑)처럼 포기한 채 어려운 형편 속에서 살았다. 이 할머니는 2006년에서야 위안부 피해자 정부 등록자에 올랐다.

이제 정부 등록 위안부 피해자 239명 가운데 생존자는 33명뿐이다. 생존자의 평균 나이가 92세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할머니들의 주장은 단순 명료하다. 가해자인 일본이 역사 앞에서 반인륜적인 범죄사실을 밝히고, 진정한 사죄 및 배상, 그리고 피해자 명예회복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정의와 도덕을 숭상하는 책임 있는 나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최소한의 조치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일본의 태도는 갈수록 가관이다. 일본정부와 극우세력은 위안부 동원에 일본군의 개입을 부정하면서 되레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를 여지없이 짓밟았다.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싼 한일 간 갈등 양상만 봐도 그러하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일본정부의 암수(暗數)에 말려들어 '최종적·불가역적인 한일 합의'에 서명함으로써 굴욕적인 외교 파장을 키웠다. 피해 당사자는 물론 많은 국민들이 돈으로 피해자를 우롱한 사기극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달 한국을 비롯해 9개국이 신청한 위안부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 등재를 저지함으로써 비양심의 극치를 보여줬다.

당진시가 시민장으로 치르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다. 빈소에는 각계인사들의 조문행렬이 뒤를 잇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외침을 더 이상 외면말라. 한일관계 재정립을 위한 국제적인 협력구도가 절실하다. 이기정 할머니의 타계 소식은 우리 마음을 우울하게 만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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