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우리에게는 아직 국민시인이라 불리는 시인이 아직 없다. 국민시인으로 불리려면 가능한 그 시대를 함께 살면서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감성을 어루만지는 동시대 인물이면 좋겠지만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나 우크라이나의 쉐브첸코 같은 걸출한 문인들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으나 지금도 여전히 국민시인으로 추앙된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윤동주 시인을 국민시인으로 꼽아본다. 광복을 몇 달 앞두고 옥사한 윤동주 시인의 비극적인 삶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고 암흑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기적처럼 맑고 깨끗한 그의 시는 시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원초적인 역할을 아낌없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려 애썼던 그의 고결한 내면 등 윤동주 시인의 문학과 삶은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지난주 일본 교토 우지강변에는 교토에서만 세 번째, 민간인으로는 처음 세운 시비가 제막되었다. 민족과 환경을 초월하는 윤동주 시인의 힘은 그가 핍박받았던 일본에서 오히려 새롭게 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곳곳에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공간이 들어서고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여러 행사가 잇따르고 있지만 부디 일회성 행사나 기억에 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우리 민족 가슴에 새겨진 따뜻하고 깨끗한 영혼의 표상, 순수한 언어의 맥박을 전하는 국민시인으로서 윤동주 시인의 삶과 시가 오래 불 밝혀지기를 소망한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