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까지는 글과 담을 쌓았다. 그냥 싫었다. 쓸 말도 없었지만 일단 쓰기도 싫었다. 간혹 점수를 위해서라면 농사꾼인 부모의 말을 빌어서 썼다. 그러나 정작 말은 글로써 표현되지 않았다. 그러니 더 글이 싫어졌고 더불어 말이 괴로웠다. 하지만 학교교육은 말을 강요했고 그에 따른 글을 요구했다. 세상이 글로써, 말로써 지겨워질 즈음 개벽이 일어났다. 별안간 글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교 국어선생님 덕분이었다. 교사는 말로 글을 가르치는 법인데, 이 분은 글로 말을 깨우치게 했다. 못써도 칭찬했고 못써도 고치지 않았다. 다만 방향만 잡아줬다. 글쓰기가 즐거워지자 모든 게 활자로 기록됐다.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언어를 깨우는 소리였다. 그해 여름, 제법 큰 글짓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자음 14자와 모음 10자는 생각의 결합을 통해 무수하게 번식한다. 일단 겹자음과 모음까지 합치면 40자가 된다. 한글에는 총 51만1160개의 어휘가 있는데, 우린 초등학교 때 대략 2만개의 낱말을 배운다. 한글은 가장 배우기 쉬운 표음문자다. 모든 사람이 하루면 다 배울 수 있다고 해서 아침글자라고도 불린다.(참고로 중국은 표의문자여서 모든 글자를 다 외워야 한다) 그런데 정작 하루에 쓰는 단어는 그리 많지 않다. 색깔을 표현하는데 10개, 음식을 표현하는데 50개, 의복을 표현하는데 50개, 그리고 집과 관련된 단어들이 50개 단어다. 결국 의식주와 관련해 200개 단어만 알아도 서로 통한다. 여기에 기분이나 동작을 표현하는 100개의 동사를 집어넣으면 끝이다. 평생 51만개의 어휘를 다 쓰고 죽는 사람은 없다.

▶글은 누구나 쓸 수는 있지만 누구나 잘 쓰지는 못한다. 그만큼 어렵다. 그래서 글쟁이들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책을 쓰고 내다판다. 책 제목도 상투스럽다. 사람을 움직이는 글쓰기 비법, 온몸으로 체득한 글쓰기, 글쓰기가 제일 무서운 당신을 위한 처방전, 글쓰기 영업비밀 전격 공개,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내 삶을 바꾼 글쓰기, 이기적인 실용 글쓰기 등등….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밥벌이를 위해서 쓰는 건 추하다고. 그런데 그런 말을 뱉는 자들이 더 추하다. 글쟁이들은 대부분 생계형이다. 작가 김훈은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일갈한 바 있다. 이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글은 친구다. 꼭꼭 숨어 있던 사유(思惟)들이 밖으로 나와 춤을 추는 순간, 희로애락이 녹는다. 용서도, 미움도 허용된다. 글은 마음의 족쇄를 풀어주는 큰 회포인 것이다. 칼럼 ‘충청로’가 499회를 맞았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가장 주안점을 둔 점은 온기(溫氣)였다. 상대방의 체온을 생각해주면 나도 따뜻해지지 않을까 하는 자조가 많았다. 잘도 버텨왔다. 글은 ‘새벽’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꿈을 꾸고 있을 때 누군가는 꿈을 위해 뛰고 있다. 그런데 우린 새벽을 여는 사람들의 존재조차도 잊고 산다. 그 시린 아침을 함께 얘기하고, 공유하고 싶었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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