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섭 청주시 문화재단 컨텐츠진흥팀장
[에세이]

온 몸이 마비됐다. 마음까지 저려왔다.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부끄러움까지 가세해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도끼로 머리를 맞은 듯 얼얼함에 밤새 앓아야 했다. 꿈에 그리던 도시의 낯선 풍경과 고풍스럽고 낭만 가득한 여정은 내겐 사치에 불과했다. 진정으로 나는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와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보여주는 짧지만 명료한 체험이었다.

베니스비엔날레에서의 충격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비엔날레의 어머니'라 불리는 베니스비엔날레는 두 차례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고는 122년 동안 격년으로 열려왔다. 베니스비엔날레는 10년 만에 찾아온 필자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축적의 시간이라는 비밀, 그 속에서 빛나는 공간과 미술의 조화, 삶과 죽음의 경계, 예술이 가야할 길을 묵상토록 했기 때문이다.

올해 베니스비엔날레의 주제는 'VIVA ARTE(만세, 예술 만세)'다. 전쟁과 폭력과 욕망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지막 수단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베니스비엔날레가 나를 고립시킨 것은 옛 조선소를 활용한 주제전이었다. 세계의 주요 국가가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지향하는 바나 예술에 대한 시선이 각양각색인 개연성은 충분하다. 사진으로, 회화로, 미디어로, 디자인으로 작금의 경향을 담고 있으며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평가도 엇갈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무디어진 내 삶의 촉수를 번뜩이게 하는 빛이 쏟아졌다. 가난하고 어리석은 자는 길 한복판에서도 방황하거나 삿된 길을 걷게 마련인데, 이런 내게 성찰의 시간이었다. 거짓과 위선과 얄팍한 상술에 타협하지 말고 가야할 길을 엄연하게 갈 것을 촉구하는 소리 없는 데모였다.

폐허가 된 조선소는 거대한 예술공장이었다. 그 규모에 놀라고, 세계 각국 최고의 예술가들이 펼치는 성찬에 놀라고, 체계적인 운영 시스템에 놀라고, 예술에 굶주린 사람들의 눈동자와 발걸음에 놀랐다. "비바, 비바~"를 연신 외칠 수밖에 없었다.

나를 가슴 뛰게 한 비밀은 축적의 시간에 있었고, 공간에 대한 가치와 예술에 대한 깊은 믿음에 있었다. 그들은 122년이라는 축적된 시간 속에서 비엔날레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읽고 있었다. 축적된 경험을 지적 자양분과 예술적 영감으로 승화시켰다. 옛 조선소의 거대한 공간을 원형 그대로 보존해 활용하는 지혜와 용기가 돋보였다. 붉은 벽돌, 낡은 창고와 기계, 빛과 그림자, 허공을 헤매는 바람까지도 그들에게는 예술을 빚는 풍미 깊은 소재였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엊그제 청주공예비엔날레가 폐막했다. 올해로 10회째다. 축적의 시간, 공간의 가치, 비엔날레 본질, 세계를 향한 메시지를 만드는 일에 충실했는지 묻고 싶다. 10회는 결코 짧지 않다. 필자는 이 중 6회에 걸쳐 기획자로 참여했고, 예술의전당의 천막전시에서 담배공장의 아트팩토리 전시로 이끌었다. 그 자부심으로 버텨왔는데 현실에 안주한 죄가 크다. 10회의 축적된 시간과 경험과 자원을 얼마나 활용하고 있는가. 더 큰 결실을 위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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