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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로] 일상 4종 세트

나재필 기자 najepil@cctoday.co.kr 2017년 10월 19일 목요일 제23면     승인시간 : 2017년 10월 18일 19시 06분
남자가 사는법 4종 세트, 남자가 살고 싶은 1종세트

▶밥솥에 쌀을 안친다. 손바닥을 수면에 대고 물의 양을 가늠한다. 손등 위까지 찰랑찰랑하면 좋다. 그것보다 물이 많으면 밥이 질고 적으면 되다. 찌개가 끓고 있다. 김치찌개는 오래 끓일수록 맛이 우러나고, 된장찌개는 센 불에 확 끓여야 텁텁한 맛이 줄어든다. 김치찌개든 된장찌개든 새우젓을 조금 넣으면 묘한 풍미가 있다. 나물은 소금과 깨소금으로 조물조물 무치는데 아무리 요리를 못해도 참기름을 두르면 맛이 산다. 중국요리는 파 기름, 서양요리는 올리브유만 있으면 절반은 끝난다. 천하의 백종원도 이런 간단한 레시피를 뻥튀기해서 먹고 산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별 거 없다는 얘기다. 밥이 익는 동안 세탁기를 돌린다. 그리고 설거지와 청소를 끝낸다. 걷어놓은 빨래를 개고 나면 세탁이 종료음을 울린다. 대략 1시간의 일과다. 밥 짓고 찌개 끓이기, 빨래, 청소, 설거지…. 이름하여 살림 4종 세트다.

▶어릴 적 살던 외딴집은 모든 게 사무쳤다. 놀이도, 벗도 없는 적막강산이었다. 바람에도 색깔이 있었고 볕에도 눈물이 머금었다.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은 외로움에 맞서는 길밖엔 없었다. 부대끼고 흔들리면서 그냥 시간 위에서 투벅투벅 걸었다. 문제는 눈물도 무서웠다는 거다.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무언가 들켜버리면 안될 거 같은, 마치 알량한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싶은, 그런 비애였다. 어둠이 사위를 삼키던 시간, 어린 마음은 바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나흘 출타를 반복하던 때였기에 집안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일은 대략 정해져있었다. 밥 짓고 설거지, 빨래하기(개기), 군불 때기, 셰퍼드 밥 주기 등 4종 세트. 물론 청소는 덤이었다. 매번 일의 순서를 일정하게 해놓다 보니 모든 건 1시간정도면 끝났다. 이런 일련의 것들은 차츰 습관으로 굳었다.

▶학창시절 자취할 때도 4종 세트는 기본이 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 귀찮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혼자서 밥을 먹더라도 김치하나 달랑 놓고 먹지 않았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정 먹을 게 없으면 잡탕이라도 끓였다. 그러니 혼밥이 절대 궁상맞을 리 없었다. 이런 성찬의 생활이 알려지자 자취방은 항상 배고픈 후배들로 문턱이 닳았다. 4종 세트를 수행할 때는 모든 일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야 한다. 세탁기가 돌아가고 밥이 익어갈 타임에 설거지와 빨래개기를 하는 식이다. 쉴 틈이 없어야 빨리 끝내고 쉴 수 있다.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후배에게서 1년 만에 전화가 왔다. 안녕을 묻는다. 살아있으니 받는 거 아니냐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후배에게 안녕을 되물었다. 1년 동안 일본연수를 다녀왔노라고 했다. 가족과 함께 '공짜 장기여행'을 한 것이다. 회사가 그 정도 해줬으면 뭔가 특명이나 프로젝트가 있지 않겠느냐고 '악의적으로' 캐물었다. 대답이 예상을 빗나갔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케어(care) 차원에서 보내준 거라고 했다. 그날 밤, 난 수없이 뒤척였다. 잠결에 '살림 4종 세트'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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