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살던 외딴집은 모든 게 사무쳤다. 놀이도, 벗도 없는 적막강산이었다. 바람에도 색깔이 있었고 볕에도 눈물이 머금었다.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은 외로움에 맞서는 길밖엔 없었다. 부대끼고 흔들리면서 그냥 시간 위에서 투벅투벅 걸었다. 문제는 눈물도 무서웠다는 거다.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무언가 들켜버리면 안될 거 같은, 마치 알량한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싶은, 그런 비애였다. 어둠이 사위를 삼키던 시간, 어린 마음은 바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나흘 출타를 반복하던 때였기에 집안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일은 대략 정해져있었다. 밥 짓고 설거지, 빨래하기(개기), 군불 때기, 셰퍼드 밥 주기 등 4종 세트. 물론 청소는 덤이었다. 매번 일의 순서를 일정하게 해놓다 보니 모든 건 1시간정도면 끝났다. 이런 일련의 것들은 차츰 습관으로 굳었다.
▶학창시절 자취할 때도 4종 세트는 기본이 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 귀찮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혼자서 밥을 먹더라도 김치하나 달랑 놓고 먹지 않았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정 먹을 게 없으면 잡탕이라도 끓였다. 그러니 혼밥이 절대 궁상맞을 리 없었다. 이런 성찬의 생활이 알려지자 자취방은 항상 배고픈 후배들로 문턱이 닳았다. 4종 세트를 수행할 때는 모든 일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야 한다. 세탁기가 돌아가고 밥이 익어갈 타임에 설거지와 빨래개기를 하는 식이다. 쉴 틈이 없어야 빨리 끝내고 쉴 수 있다.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후배에게서 1년 만에 전화가 왔다. 안녕을 묻는다. 살아있으니 받는 거 아니냐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후배에게 안녕을 되물었다. 1년 동안 일본연수를 다녀왔노라고 했다. 가족과 함께 '공짜 장기여행'을 한 것이다. 회사가 그 정도 해줬으면 뭔가 특명이나 프로젝트가 있지 않겠느냐고 '악의적으로' 캐물었다. 대답이 예상을 빗나갔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케어(care) 차원에서 보내준 거라고 했다. 그날 밤, 난 수없이 뒤척였다. 잠결에 '살림 4종 세트'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