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신간 '언어는 인권이다' 출간

"쉬운 우리말을 써야 인권과 민주주의도 지킬 수 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신간 '언어는 인권이다' 출간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출근길, '스크린 도어'가 열리면 지하철을 탄다. 회사에 도착하면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이 기다리고 있다.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파악하고 '네고'를 하는데 서로 '솔루션'이 없어 일단 '홀드'하기로. 과장은 '팔로우 업' 잘 하라고 지시한다. 주말 아침 늦게 일어나 '브런치'를 먹고 가족들과 함께 '쇼핑'을 하러 '마트'에 간다. '하이브리드카'다. '내비게이션'을 켠 후 집 근처의 '스쿨 존'을 지나 홍제 '램프'로 들어간다. '파킹'을 한 뒤 '카트'를 끌고 '무빙 워크'를 타고 쇼핑을 하다가 '푸드코트'에 들러 '테이크아웃 커피'를 산다.'

익숙한 이 풍경은 우리말 운동단체인 한글문화연대의 이건범 대표가 묘사한 영어 사용 모습이다. 18년간 우리말 운동을 해온 이 대표는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능력이 필요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 경향이 지나치며 이는 자칫 우리 사회의 불공정과 차별, 배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 대표는 신간 '언어는 인권이다'(피어나 펴냄)에서 쉬운 우리말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로 인권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는 특히 정부 등 공공기관이 사용하는 공공언어 가운데 어려운 말이 무엇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교묘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국민의 알 권리와 평등권을 짓밟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지하철역에 설치된 '자동제세동기'는 심장마비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장치다. 그러나 '심장충격기'라는 쉬운 말 대신 '자동제세동기'나 'A.E.D'로 표기된 탓에 눈앞의 장치를 보고도 사용처를 알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보건의료정책과 관련해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포괄수가제'라는 말은 의료계 관계자가 아니면 대다수 국민은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같은 병에 대해서는 어느 병원을 가더라도 미리 정해진 의료비를 내도록 한 이 제도는 '질환별 의료비 정찰제'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어려운 표현은 우리의 생활과 직결된 중요한 국가 정책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회복지 대상자 중에는 학력이 낮거나 정보를 얻기 어려워 최신 용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그들이 접하는 어려운 복지용어들은 알 권리를 막기도 한다.

'복지 바우처'는 식권을 식당에 내고 밥을 먹는 것처럼 복지제도를 사용할 때 쓰는 이용권이지만 굳이 '복지 이용권'이란 말 대신 '바우처'라는 외국어를 사용한다. 저자는 이를 두고 "어려운 말은 어려운 이의 어려움을 더 키운다"고 지적한다.

외국어 사용은 또 불편을 감추고 차별을 덮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노숙자, 부랑인 대신 쓰는 '홈리스'나 '노인' 관련 문제에 쓰이는 '실버'는 불편함을 감추려는 용어들이다. '다문화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쓴 '다문화'라는 말은 외국 이주민 가정의 우스꽝스러운 별명이 돼 오히려 차별을 더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커피 나오셨습니다' 같은 말은 사물 존대를 넘어 사람의 값어치를 낮추는 말이기도 하다.

저자는 소통이 말과 글에서 이뤄진다면서 국어를 잘 지키고 다듬어 우리 모두가 편하게 쓸 수 있어야 소통의 장벽을 없앨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편하고 풍부하게 국어로 소통할 수 있어야 인권과 민주주의도 지킬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312쪽. 1만6천원.

zitrone@yna.co.kr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