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낱말속 사연]

두문불출(杜門不出). "학교에서 도대체 뭔 일이 있었는지, 지난주부터 아들은 등교거부는 물론 두문불출하고 있어." 집안에만 틀어 박혀 밖으로 나다니지 않음을 일컫는다. 글자대로 풀이해보면 '두문을 나가지 않는다'이다. 고려멸망과 조선개국의 분기점에서 유래된 이 말에는 고려충신의 사연이 담겨 있다.

'두문'은 실제로 '두문동(杜門洞)'을 칭하는 단어로,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의 골짜기에 위치한다. 이곳은 고려 왕조를 모시던 유생과 신하들이 조선이 건국하자 벼슬살이를 거부하고 은거해 살았던 마을이다. 이성계는 1388년 요동정벌을 멋대로 포기하고 위화도에서 회군, 정변을 일으켰다. 이성계는 먼저 고려의 총사령관인 최영을 유배시키고 처형했다. 곧이어 우왕을 폐위시키고 아들인 창왕에 이어 공양왕을 내세워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내친김에 이성계는 1392년 7월 16일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의 선위 형식을 빌려 조선 국왕에 즉위했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에 성공했지만 고려의 신하 72인은 이성계의 조선개국과 국왕 즉위를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경기도 개성시 동현동 경덕궁 앞에 있는 고개에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하겠다는 실력행사를 벌였다. 고려에 충성을 잃지 않았던 유생들이 과거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았고 신하들은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 고개에서 나무에 관(冠)과 조복(朝服)을 걸어 놓고 곧장 두문동으로 은거했다. 이런 불충에 조선 왕조가 방관할리 없었다. 두문동을 포위하고 72인을 모두 불살라 죽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 고개를 '부조개' 혹은 '부조현(不朝峴)'이라 불렀다. 1740년 조선 영조는 이 고개에 친히 '고려충신부조현(高麗忠臣不朝峴)'비를 세워 72인을 기렸다. 이에 대한 기록은 조선 순조 때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이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에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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