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도솔산은 낮아서 좋다. 가파른 오르막이 한개 뿐이다. 두개의 구릉도 부담스러운 편이 아니다. 나머지는 오솔길이어서 등산이 아니라 산책에 가깝다. 곱게 깔린 황톳길은 발바닥의 압점을 전혀 거스르지 않는다. 길 양편의 숲 또한 피톤치드의 기운을 아낌없이 뿜고, 그 기운은 사위를 감싼다. 이런 호사 덕에 최소 보름에 한 번씩은 도솔산에 간다. 산은 사계절의 표정 외에도 특별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특히 가을 산은 묵직해서 좋다. 신록이 적갈색으로 가기 전 막심을 쓰는 때라 풍경이 아주 적요하다. 깊다. 바람 또한 적당한 냉기를 품어 청량감을 준다. 이런 공기는 질리지 않는다. 여름의 공기는 쓰고 겨울의 공기는 시다. 이런 볕 좋은 날은 일 년에 며칠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을은 최대한 빠르게 즐겨야한다. 잠시 한눈을 팔면 가을은 겨울 앞으로 줄행랑치고 없다.

▶여자가 봄을 타고 남자가 가을을 타는 것은 순전히 바람 탓이다. 즉 바람이 범인이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면 여자의 허파엔 엽록소를 잔뜩 머금은 핑크빛 사랑이 돋아난다. 그 바람은 때론 첫사랑의 서툴렀던 키스로 재생되기도 하고 때론 나이 먹어가는 자신의 변화에 경종도 울린다. 그래서 봄바람은 여자의 치맛바람이다. 들썩들썩, 괜히 가슴이 펄럭인다. 다만 봄바람은 다소 변덕스럽다. 마치 조울증에 걸린 듯 웃다 울다 종잡을 수가 없다. 바람으로 치자면 습하고 무더운 '된마(동남풍)' 정도라고나 할까.

▶남자의 가을바람은 센티멘털 와인드(wind)다. 모두가 시인이 되거나 혹은 광인이 된다. 별것도 아닌데 폼을 잡게 되고, 별일도 아닌데 눈물이 나기도 한다. 이렇게 개폼을 잡을 때에는 그냥 놔두는 게 상책이다. 괜히 토를 달거나 피식 웃기라도 하면, 일이 커진다. 바람으로 치자면 ‘하늬바람’ 정도다. 맑은 날 서쪽에서 부는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인데, 온랭이 아닌 중탕 정도의 세기다. 가을이 되면 남자들은 바람이 잔뜩 든다. 고삐 끊긴 야생마처럼 기웃대고 서성거린다. 특히 나이 먹은 사내일수록 수컷의 본능을 드러낸다. 일종의 가을 발작이다. 바람처럼 웃다가 울다가 바람처럼 떠나려한다. 고로 가을은 무죄, 가을바람은 유죄다.

▶가을은 복고의 계절이다. 기억을 추억하고 추억을 기억한다. 무조건 그때가 좋아서 복고로 가는 것이 아니다. 잊지 않고 싶어서 기억해낸다. 그런데 사람이란 기억하고 싶은 것, 추억하고 싶은 것만 저장하려는 습성이 있다. 옛 연인이 아직도 기억 속에서 좋게 남아있는 건, 나쁜 추억은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달콤했던 일만 작위적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악마의 편집, 짜깁기다. 아름다운 기억일수록 오류가 많은 이유다. 결국 복고는 과거의 반추가 아니라 미래다. 기억해내면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고치고 또 고치기에 남는 건 세월의 거죽뿐이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도 지난날의 몸을 복원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 기억을 되찾아 가장 핫했던 몸의 원형질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아, 가을이다. 가을은 막 시작한 노을처럼 붉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