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빠짐없이 태극기 게양…잠시나마 생지옥 공포 떨쳐내
총칼앞 짓밟힌 어린 소녀시절
이맘때면 그때로 다시 돌아가
인재가 많아야 나라 부강해져
억척스레 모은 돈 장학금으로
보은 평화의소녀상 건립 추진
군민 참여 반갑고 고마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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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충북도내에 유일하게 생존 중인 위안부 피해자인 이옥선(88·보은군 속리산면 사내1리) 할머니가 맞는 광복 72주년은 감회가 남다르다.

매년 맞는 광복절이지만 해마다 이맘때면 할머니의 기억은 일제의 총칼 앞에 짓밟힌 어린 소녀 시절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할머니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고향인 대구에서 일본군에 의해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뒤 중국에서 3년 동안 한맺힌 시간을 보냈다. 1945년 광복 후 꿈에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지만 종군위안부라는 꼬리표가 달려 고향을 떠나게 됐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거처할 곳을 찾지 못해 전국을 떠돌다 보은군에 정착한 후 현재까지 70여년 동안 혈혈단신으로 어려운 생활을 이어왔다.

특히, 이 할머니는 보은군에 정착한 뒤로 나라를 위해 대문 앞에 태극기를 내걸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기원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하루도 태극기를 빼놓지 않고 게양하고 있다.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조국을 원망하면서도 힘차게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면서 잠시나마 생지옥 같았던 위안소 공포를 떨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할머니는 보은군 기초생활수급자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2011년 (재)보은군장학회에 2000만원의 전 재산을 내놓기도 했다. 정부의 기초생활지원금과 위안부 생활안정지원금을 받아 어렵게 생계를 꾸리는 할머니는 음식점 허드렛일과 날품팔이 등을 하면서 억척스럽게 모은 값진 돈이다.

보은에 정착한 후 서른을 넘긴 나이에 결혼했지만 위안소에서 망가진 몸 때문에 아이를 갖기 못한 그녀는 “젊은 인재가 많이 나와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며 “두번 다시 나라를 잃는 불행이 없도록 내 돈 전부를 조국의 미래에 투자했던 것”이라고 장학금 기부이유를 설명했다.

요즘 들어 이 할머니는 다리가 아프고 잦은 기침으로 거동조차 불편하다. 몸이 그나마 괜찮을 때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했는 데 이제는 그마저도 힘에 부친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나라 잃는 설움을 경험하지 못한 요즘 젊은이들이 나라와 국기의 의미를 잊고 사는 것 같다"며 "광복절 하루 만이라도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광복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요즘 이웃들로부터 반가운 소식 하나를 전해 듣고 어린아이처럼 기분이 들떠있다. 자신이 사는 보은에 충북 3번째 평화의 소녀상 건립이 추진된다는 얘기다.

보은지역 200여 곳의 사회단체는 지난 5월 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지금까지 8000만원이 넘는 군민 성금을 모았으며 군청 공무원부터 시장 상인, 농부는 물론, 고사리 손의 어린 학생까지 호주머니를 털어 모금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구왕회 추진위원회 상임대표는 “모금활동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당초 목표액인 5000만원의 1.5배가 걷혔다”며 “이 할머니의 존재 자체가 군민들의 참여 의지를 자극했다”고 말했다.

보은 평화의 소녀상은 오는 10월 보은읍 시가지 복판인 뱃들공원에 세워질 예정으로 미국 애틀랜타 소녀상 건립위원 중 한 명이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정통한 친한파인 마트 혼다 미국 전 연방 하원의원도 제막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이 할머니는 “국민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일본의 만행을 기억하면 12·28 합의로 슬그머니 위안부 문제를 덮으려는 일본도 어쩔 수 없이 태도 변화를 보일 것”이라며 “전국에, 또 세계 여러 나라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한편, 전국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 생존자 238명 중 최근 김군자 할머니가 별세하면서 남은 생존자는 37명으로 줄었다.

보은=박병훈 기자 pbh0508@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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