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랄스러울 때는 지랄이라 해야 맞다

사진 = 아이클릭아트 제공
▶모든 인간에게는 일생 쓰고 죽어야하는 '지랄 총량'이 정해져있다고 한다. 김두식 한동대 법대 교수의 썰(說)이다. 어떤 사람은 그 지랄을 사춘기에 다 쓰고, 어떤 사람은 뒤늦게 찾아온 지랄을 죽기 전까지 소진한다는 게 요지다. 지랄(간질)은 단어 자체의 어감이 경박스럽지만, 법석 떨며 얄궂게 하는 행동을 빗댄 순우리말이다. 한마디로 발작이다. 이왕 '지랄' 얘기가 나왔으니 한 번 더 복습하면 지랄은 끝까지 지랄해야 끝이 난다. 지랄 같은 일들이 쌓이면 숨이 턱턱 막혀오고 흔적이 남는다. 지랄병은 사회가 미쳐 돌아가기 때문에 생긴다. 잘못한건 없는데 잘못했다고 몰아붙이니 지랄이다. 물론, 미친 세상은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인만 모른다.

▶물 같은 리더십이 나은가, 불같은 리더십이 나은가. 불은 물로 끌 수 있다. 물은 자체로 끓지 않는다. 물과 불은 절대로 섞이는 일이 없다. 불은 어떠한 매개(그릇)가 있어야 물을 이길 수 있다. 물불 가리지 않고 용을 써봤자 물은 물이다. 물론 불은 불로써의 개별성만 가진다. 사람도 물과 불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만 관대하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웬만해선 잘못한 일도 그냥 슬쩍 넘기려고 한다. 그러면서 남의 잘못은 못 봐준다. 지랄이다. 자신에게 엄중하고 상대에게는 관대하지 않다. 지랄 같은 생각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발작하면 아무도 못 말린다. 노자도 그걸 지적했다. 똑바로 살라고.

▶난 지랄 총량을 다 쓰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쓴 적이 없다. 20대에 국가를 향해 지랄해야 했지만 지랄하지 못했다. 30대에 청춘에 대해 지랄해야했지만 이 또한 못했다. 40대엔 직장에 대해 발작해야 했는데 몸은 꿈쩍도 안했다. 50대에 들어서니 몸이 말로써 기억하려고 한다. 발작하라고. 지랄하라고. 그게 정답이 아니라고. 그런데 아직 증세가 없다. '맘'은 발작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지랄 총량이 있다는데, 총량은 둘째 치고 함량이 부족하다. 고로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 사람이다.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익혀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살기 위해….

▶모든 사람은 사랑과 존중을 꿈꾼다.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존중받길 원한다. 사랑받길 원한다. 그런데 현실은 지랄 맞다. 지랄 같은 일들만 생긴다. 예쁜 말들을 써야 하지만, 말의 맛을 살리려면 고상한 말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지랄스러울 때는 지랄이라 해야 맞다. 지랄 맞은 것을 지랄이 아니라고 하는 게 더 지랄 맞다. 우린 위선의 동물이다. 그래서 앞에서 쓰는 언어와 뒤에서 쓰는 언어가 다르다. 화가 날 땐 그냥 분노하고 지랄해야한다. 오래 살려면….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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