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충북도교육정보원 교사
[시선]

예술에서 표절은 몰락과 수치를 의미하며, 표절과 창작의 경계는 언제나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김상용 시인은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으로부터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멋진 한 소리를 뽑아 냈고, 윤동주 시인은 맹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으로부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노래해 가슴깊이 사무치는 울림을 남겼다.

이들 작품은 환골탈태한 창조적 변용의 좋은 사례들이지만, 워낙 표절에 민감한 창작의 세계에서는 어떤 유사성만 발견돼도 흠칫 돌아보게 되기 마련이다. 광고나 대중음악, 영화나 상품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방, 변용, 리메이크, 패러디, 패스티시, 오마주 등 표절과 경계는 짓되 원본작품과의 연관성을 밝히려는 시도로 다양한 개념과 기준이 제시되고, 때로는 격렬한 논쟁도 벌어진다.

한편 '공유경제'라는 개념은 물건이나 공간 등 사회적 재화를 함께 빌리고 나눠 쓰는 사회적 경제 모델로써 우리나라에서는 에어비앤비(Airbnb), 우버(Uber) 등 스마트폰기반 사업의 확산을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이러한 모델들은 애초의 공익성을 잃고 이윤추구의 상업경제로 변질됐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이에 따라 공유경제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거리의 인문학자'로 알려진 이도흠 교수는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라는 저서를 통해 '공유경제에서 원본과 가짜, 창조와 표절, 패러디와 표절의 경계는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있다'고 밝혔다. 독창성과 창조는 모방과 표절에 비해 에너지가 많이 들기에 비효율적인 것으로 취급받으며, 오히려 예술의 독창성마저 상품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추세를 반영하듯 최근 언론에서도 베끼기가 급증하고 있다. 봇으로 자동 생성된 듯한 기사들로부터 가짜뉴스까지, 무책임한 표절과 모방이 미디어의 세계에서도 늘어나고 있다. 때로는 일부 이해관계자들의 편향된 관점을 담은 첫 기사가 여과 없이 반복·확산되며 여론을 반영한 기사인지, 여론을 조작하는 기사인지가 헷갈릴 때도 있다.

공유경제와 상업경제의 구분이 모호하다지만, 이를 구분하는 근본적인 기준은 '공익성'이다. 자원이 한정된 지구에서 우리가 함께 지속가능한 삶을 살기 위해 좀 더 정의롭고 지혜롭게 소비해보자는 것이다.

표절과 창조적 모방의 구분도 모호하지만, 이를 구분하는 기준 역시 작품에 담긴 정신일 것이다. 작가가 진심으로 전하고 싶은 그 정신이 살아 있을 때 대개의 모방은 독창적 예술로 인정받게 된다.

세상을 읽는 우리의 창,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똑같은 사건사고를 베껴서 전하더라도 정론직필의 정신이 참된 언론의 가치를 빛낸다. 저작권법에서 기사문의 모방을 허용한 것은 그만큼 팩트의 힘과 가치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팩트는 '악마의 편집'이 아닌 '사회의 목탁'을 위해 활용돼야 한다. 가치와 정의가 빠진 사실들의 집합은 오히려 허구에 가깝다. 진정성 없는 베끼기만이 난무한다면, 이도흠 교수의 지적처럼 '대중들이 체제가 요구하는 상투적인 상상과 사고에 빠질 것'이 우려되며, 그만큼 우리 사는 세상은 행복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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