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환경의학 의사들이 쓴 한국 노동현장 보고서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이 말하는 직업병 잔혹사

직업환경의학 의사들이 쓴 한국 노동현장 보고서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1988년 7월 서울 영등포의 공장에서 일하던 15세 소년이 극심한 고통 끝에 숨졌다. 온도계에 수은을 넣는 일 등을 2개월가량 하면서 수은 등에 중독된 탓이었다. 이마저도 병원과 한의원을 전전하던 끝에 만난 한 의사가 "어디서 일하다가 이렇게 되었니?"라는 물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소년의 죽음은 직업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했다. 최대의 직업병 사건인 원진레이온 사태와 더불어 본격적인 산업재해 추방과 조직적인 노동자 건강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그러나 지금도 일터에서는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일하자'는 30년 전 구호가 여전히 절박하게 울려 퍼진다. 10여 명의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나름북스 펴냄)을 펴낸 이유이기도 하다.

책은 부산 제일화학에서 뿜어냈던 '죽음의 먼지' 석면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의사들이 다양한 직업병과 산업재해 사건들을 목도한 소회를 담아냈다. 현재의 산업재해를 다룬 2부에서는 "위험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취약한 노동자에게, 아래로 아래로 향하는" 현실이 극명히 드러난다. 기록은 담담하지만,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자주 코끝이 찡해진다.

'일하다 죽지 않는 사회'를 가로막는 요인은 한둘이 아니다.

생산성과 이윤만을 따지는 노동환경, 노동자 생명권 보호보다 은폐와 책임 회피에 급급한 기업, 기업이 빠져나갈 틈을 주는 허술한 법망, 합의부터 종용하는 경찰, 노동자의 권리를 적극 주장하는 데 미적대는 노동행정 당국, 노동자를 쥐어짜는 현실에 무관심한 다수의 우리 등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고 책은 지적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 백혈병 발병 문제를 해결하고자 10여 년간 뛰어온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공유정옥 씨는 중요 제보자였지만 돌연 국정감사에 사측 증인으로 나타나 유해 물질은 없다고 주장했던 이를 떠올리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노동자가 작업환경 문제나 자기 질병에 대해 말하는 그 간단한 일조차 이렇게 공포와 긴장을 견뎌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병들고 아픈 노동자들을 치료하는 것에서 나아가 우리 사회 변화를 촉구해온 직업환경의학 의사들은 '노동안전보건활동가'이기도 하다. 산업재해로부터 자신을 온전히 지켜낼 힘이 없는 노동자에게 "어디서 어떤 일을 하다가 이렇게 됐느냐"고 묻는 이들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일깨워주는 책이다. 책에서 작업장 내 유해 물질뿐 아니라 '골병'을 유발하는 노동강도, 스트레스를 넘어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정신 질환을 비중 있게 다룬 점은 의미 있는 시도다.

332쪽. 1만5천 원.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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