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문화카페]

▲ 충주 탄금대 권태응 '감자꽃' 노래비. 사진=이규식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시비(詩碑)는 대구 달성공원에 1948년 세워진 이상화 시비. 대표작 '나의 침실로' 12연 가운데 11번째 연이 새겨져 있다.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歲月 모르는 나의 寢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게로"라는 대목이 70년 세월의 흔적을 안고 시비의 원조답게 그 곳을 지키고 있다.

그 이후 문단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고령사회가 급진전하는 가운데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시비를 포함한 문학비는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문학단체나 동아리, 지자체 등에서 업적과 문학성을 기리며 공감대를 이루어 세운 경우도 적지 않지만 문학적 성취나 삶의 족적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은 문인들 스스로 사비를 들여 건립한 경우가 태반이어서 자기과시, 자기만족에 그치고 있다.

특히 교육계 인사가 학교장으로 봉직하는 학교에 자신의 시비를 세우는 사례나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고 덩그러니 들어선 볼썽사나운 문학비는 호감은커녕 보는 사람의 짜증을 유발한다. 대부분 돌 재질이어서 방치될 경우 재활용도 불가능하고 환경오염으로 곧장 이어지기 때문이다.

삶과 예술에 있어 시비를 세워 현양함이 마땅한 문인들의 문학비를 적절한 장소에 건립하여 추모의 정을 북돋우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좋은 예로 충북 충주 탄금대에 1968년 어린이날에 세워진 권태응(1918-1951) 아동문학가의 노래비를 꼽아본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감자꽃' 전부). 천진하고 맑은 동요 가락이 주변 수려한 풍광과 어울려 보는 이의 감성을 자극한다. 당대 최고 지성인으로 일본 유학 중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르고 6·25전쟁의 와중에서 30대 초반 궁핍한 삶을 마감한 불세출의 시인 권태응, 그의 노래비에 새긴 순수한 서정을 음미하며 방방곡곡 산재한 자비조성 시비, 문학비 홍수 속 답답함에서 잠시 벗어나 본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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