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김갑중 을지대병원 정형외과 교수·진료협력센터장

해마다 5월은 여러 가지 행사가 많은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여러 가지 기념일이 많은 것도 부족해서 금년 5월은 국민의 손으로 새 대통령도 선출했다.

그 중 필자에게 ‘스승의 날’은 조금 특별하다. 현재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정형외과 전문의가 된 제자들도 수십 명에 이르고, 필자의 기억 속에 영원한 ‘참 스승’으로 남아있는 은사님도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총 12년의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대부분 열 두 분 정도의 담임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그 분들 중에서는 세월이 흘렀어도 또렷이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한 두 분 정도 계시기 마련일 것이다.

필자에게도 기억에 남는 은사님이 한 분 계시다. 공립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를 졸업한 필자는 2학년 때 혈기 왕성하시고 실력도 출중하셨던 30대 중반의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필자의 영어 선생님으로, 옆 반 담임도 맡고 계셨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학생들에게 영어를 잘 가르치시는 것은 물론이고, 담임을 맡고 계시는 학생들 이름 뿐 아니라 수업에 들어가시는 다른 반 학생들 이름까지도 모두 외우고 계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학생들에게 관심을 보이시고, 실력까지 있으신 분에게 영어를 배우니 자연히 영어 성적도 향상되고 즐겁게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지금 필자가 영문으로 된 교과서나 논문 등을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당시 선생님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필자가 3학년이 되던 해, 교실에 앉아 떨리는 마음으로 담임선생님 배정을 기대하던 그 순간에 영어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필자의 담임선생님으로 배정된 것이었다. 너무나 친숙하신 분이기도 했고, 수험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존재가 더없이 반갑고 힘이 됐다.

선생님과 함께 치열한 수험생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진학하던 해, 선생님께서도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시게 됐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전근가신 학교에서도 출중한 실력으로 영어 잘 가르치시는 선생님으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필자는 대학생이 된 후에도 해마다 5월 스승의 날 즈음이면 선생님이 계신 학교로 같은 반 친구들과 인사를 드리러 가곤 했었다. 찾아뵈면 교무실에서 동료 선생님들에게 우리를 소개해 주시고 반갑게 맞아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선생님께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근무 도중 말기 암 진단을 받으시고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는 것이다. 당시 선생님의 연세는 현재 필자의 나이보다 훨씬 적은 30대 후반이셨다. 진단 당시 암 세포가 전신으로 퍼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소식을 접한 필자와 같은 반 친구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병문안을 가고 싶어도, 선생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시다며 한사코 병문안을 마다하시는 통에 한 번 찾아뵙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의 투병 생활 끝에 선생님의 부고(訃告)를 듣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결국 사모님과 어린 두 아드님을 남기고 영원히 세상을 떠나신 것이었다.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다.

그렇게 선생님이 떠나시고 얼마 후 사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찾아간 적이 있었다. 혼자되신 사모님은 무척이나 의연하셨고, 선생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에게도 연신 감사의 뜻을 전하셨다. 그리고 선생님이 떠나신 지도 벌써 26년이나 됐다.

평소 금슬이 좋은 부부가 먼저 떠난 남편을 혼자된 부인이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를 사부곡(思夫曲)이라고 한다. 필자는 해마다 스승의 날 무렵이면 젊은 나이에 세상과 이별하신 선생님을 그리며 사부곡을 부르고 싶다. 아마 선생님은 지금도 그곳에서 영어를 열심히 가르치고 계실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때의 선생님처럼 필자도 지금 근무하고 있는 의과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부속 병원에서 전공의들을 수련시키는 지도 전문의로 지내고 있다. 과연 그들에게 필자도 오랜 시간 후에 기억에 남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새삼 돌이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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