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글밭]
박재필 청주 청북교회 담임목사

새 정부가 인선한 인물들이 청문회를 거치면서 임명에 난항을 겪고 있는 뉴스들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전 정부에서 있었던 고위공직자들의 결격사유들이 새 정부에서는 통하지 않도록 하겠다면서 내세웠던 공약이 부메랑이 돼 돌아온 모양새다. 병역면탈, 부동산투기, 세금탈루, 위장전입, 논문 표절 등의 비리가 드러나면 고위공직자로 임명하는 일에 원천 배제하겠다고 공약을 했는데 첫 인선 대상자부터 이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이들이 있어 진전이 안 되고 있다. 여와 야의 위치가 바뀐 상황에서 조금도 역지사지(易地思之) 하지 않는 우리의 현실로 볼 때 이 난제를 어떻게 극복해갈지 지켜 볼 일이다. 뒷담화로 남긴 말이 아니라 너무도 분명하게, 큰 목소리로 했던 이야기라 번복하기도 쉽지 않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무런 흠결이 없는 청정한 삶을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생각해 본다. 한 여인이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잡혔다. 유대인의 율법대로 하면 여인은 몰려든 군중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 투석형을 당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그 당시의 법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인을 바로 죽이지 않고 자기들과는 다른 기준으로 살라고 설교하던 예수에게 데리고 와서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다분히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계책이 숨은 질문이었다. 이때 예수의 대답은 정말로 절묘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답이었다. 현장에 있던 군중들은 이 말에 그만 양심의 가책을 느껴 모두 떠나갔다. 그리고 예수는 남겨진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보냈다. 그렇게 철저한 종교와 율법의 시대에도 누군가에게 '먼저' 돌을 던질 수 있을 만큼 무흠의 사람으로 산 사람이 없음을 증명하는 역설의 이야기이다. 떠나간 이들은 차라리 정직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을 세울 때 들이대는 기준에 부합한 완벽한 윤리적 인간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의문이 남는다. 더구나 우리나라 근현대에는 부정과 불의, 부패가 만연했던 세월을 살아야 했는데. 그 난세의 때에 훗날을 도모하며 부모, 자녀, 가문이 제대로 관리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사막에서 잃은 바늘 찾기와 같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그때는 그랬으니 이제는 당연히 당시의 상황을 용납해 주자는 말이 아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성찰의 기회로라도 삼았으면 좋겠다.

세계가 열광하는 히브리대학교 역사학 교수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그의 책 ‘사피엔스(Sapiens)’에서 "윤리의 역사는 아무도 그에 맞춰 살 수 없는 훌륭한 이상들로 점철된 슬픈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이보다 더 간결하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기독교인은 예수를 모방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불교도는 부처를 따르는 데 실패했으며, 대부분의 유생들은 공자를 울화통 터지게 했을 것"이라면서, 종교마저도 윤리를 구현하는데 어려움이 있음을 말한다.

자, 이제는 어떻게 할까. 이제는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때인 것 같다. 여와 야의 권력 교체를 경험해 보았고, 국민들도 자기가 지지하는 세력의 집권과 퇴장을 경험해 보았다. 그리고 시대는 새로운 기준을 필요로 한다. 과거의 사건에 함몰돼 답보하지 않도록 일정한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 완벽하게 무흠의 윤리적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우리가 내밀었던 기준에 부합한 삶을 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십년 후, 이십년 후 나 자신이나 자녀들이 공개되어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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