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이사를 또 했다. 내 생애 스무 번째다. 대략 2.5년에 한 번꼴이니 거의 유목민 수준이다. 태어나서 스무 살까지 여섯 번, 자취방을 전전하고 장가를 가면서 열네 번 보따리를 쌌다. '이사'란 하면 할수록 몸집이 분다. 모으긴 쉬워도 버리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이 비웠다. 헌집의 것들은 온전치 못한 것들이어서 이미 버려질 운명이었다. 이사를 마치자 일상이 엉키고 생각이 엉켰다. 새집에서 자꾸 헌집 생각이 났다. 헌것과 새것은 내뿜는 그림자마저도 둘로 나뉜다.

▶이삿짐을 푼 첫밤은 언제나 당혹스럽다. 왠지 모를 이물감이 느껴져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분명한 낯섦이다. 길들여지지 않아 어둠까지도 뻣뻣하다. 집은 여전히 익숙함의 대상이라기보다 낯섦의 대상이고, 낯섦의 배후에는 두려움과 적대감이 숨겨져 있다. 모든 낯섦은 그 대상이 내게 어떤 행동을 보일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두렵다. 나쁜 징조로서의 적막함은 길들여져야만 이겨낼 수 있다. 낯섦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 낯섦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익숙한 것은 다분히 말초적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몸에 채워진 수분을 쏟아내고 커피를 마시는 일, 발기된 독소를 내려놓고 소소한 일상의 여백 속으로 젖어드는 일, 이런 일련의 반복은 늘 해왔던 익숙함 때문이다.

▶21세기는 노마드(Nomad·遊牧民) 시대다.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들은 첨단 디지털 장비로 무장하고 사방을 떠돈다. 시공간의 제약이 없다. 이는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유랑이다. 버려진 불모지에서 물과 풀을 찾는 건 낯섦이다. 그러나 그 낯섦은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과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익숙함에만 갇히면 미혹에 쉽게 빠진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서로가 익숙해지면 억지로라도 사랑해야만 하는 '일'이 된다. 틈은 서서히 생긴다. '별안간'이란 없다. 간혹 절름거리는 비루한 일상이 느닷없이 삶의 문을 들어설 때도 있다. 그렇더라도 정연한 삶이 어이없이 바스러지지는 않는다. 일상은 어차피 익숙한 것들로 채워진다.

▶'고구마'라는 별명을 가진 문재인 대통령은 '고답이(고구마처럼 답답한 이)'다. 우직하고 원칙적이긴 하지만 주관이 뚜렷해 보이지 않는 태도 탓이다. '노무현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그는 정치 유목민이다. 아직은 낯설다. 지금까지 봐왔던 정치의 탄성이 그러하다. 그가 버려진 정치 불모지에서 낡은 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이끌어가길 바란다. 그러려면 익숙한 정치를 버려야한다. 오히려 낯선 정치, 누군가 해보지 않은 유목의 정치말이다. 돌궐족 명장 톤유쿠크의 비석에 이런 글귀가 남아있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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