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경제 심장이 뛴다 주목! 이 기업〈6〉

어린시절 남들보다 상상력 뛰어나
최연소 기능한국인으로 선정돼
1999년 사업 첫발, 매출 100억대
위기 겪고난뒤 창업기업 돕기로
아이빌트세종, 전문성 인정받아

▲ 이준배 대표는 “사업 성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가치를 우선하는 인성이 갖춰줘야 한다”고 밝혔다.
▲ ㈜아이빌트세종 회사전경. ㈜아이빌트세종 제공
고등학교에서 ‘엉뚱’을 담당했던 소년은 ‘고졸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최연소 기능한국인, 중소기업기술혁신대전 국무총리상, 고졸출신의 대학교수 등 화려한 프로필의 이면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흔이 있었다. 남들과 다른 ‘엉뚱’과 어린시절, 그리고 성장과정에서 겪었던 아픔은 1인 창조기업에게 성공의 사다리를 건네주는 중소기업청 지정1호 엑셀러레이터 기업인 ‘아이빌트세종’의 모태가 됐다. ㈜JBL·아이빌트세종 대표인 이준배(47) 대표 이야기다.

◆㈜JBL과 ㈜아이빌트세종은

㈜JBL은 산업용 전기, 전자제품 및 반도체 장비용 정밀부품을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 ODM(제조자개발생산) 전문업체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기술개발로 21세기가 지향하는 글로벌 지식기반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모든 가공부품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자체 보유해 원가 경쟁력을 확보했다.

또 자체기술로 개발한 골프연습장용 자동 티업기를 생산하고 있다. ㈜아이빌트세종은 중소기업청 지정 1호 엑셀러레이터 기업으로 기술사업화 창업 및 투자 전문기업이다. 공유경제를 기반으로 기술, 투자, 보육, 네트워크, 공간이라는 5대 요소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선순환을 유도하고 지속 가능한 지원시스템을 확립해 나가고 있다.

◆결정적 순간

이준배 대표는 최연소 기능한국인이었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졸신화’의 주인공이다. 그의 첫번째 터닝포인트가 된 공고 졸업은 사실 자발적 선택은 아니었다.

이 대표는 자수성가 기업인이 대게 그렇듯 유독 힘든 가족사를 갖고 있다. 평안도 용강이 고향인 이 대표의 아버지는 월남 후 경찰에 봉직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았다. 전쟁과 그 이후에도 이 대표의 아버지는 생사를 넘나드는 작전에 투입됐고, 가족들의 생계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대전 보문중에서 제법 공부를 했던 이 대표는 어머니의 생활고를 덜어드리기 위해 실업계고 진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충남기계공고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은사인 박준태 선생님을 만났다.

박 선생에 의해 이 대표는 기능대회 선수로 선발됐다. 박 선생은 3명의 선수를 선발했는데 선수선발 기준은 ‘소질’, ‘똑똑’, ‘엉뚱’이었다. 이 대표는 ‘엉뚱’ 담당이었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남들과 다른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재능을 믿지 못했던 이 대표는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충남대 기계설계공학과에 합격했는데, 청주 금성계전(현 LS산전)에서 기능올림픽 선수단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박 선생은 이 대표의 창의성을 믿고 취업을 권유했다. ‘고졸신화’의 시작이다.

금성계전 시절 이 대표는 만족스런 직장 생활을 했다. 안정적이고, 급여도 괜찮았다. 결혼도 했고, 집도 샀다. 모든 것이 괜찮은 줄 알았다. 그렇지만 대기업 내에서 ‘고졸’의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이로 인해 고민하는 선배를 보고 이 대표는 1997년 과감히 안정된 직장을 나왔다. 이후 2년간 중소기업에서 경영을 배우고, 1999년 자신이 살던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의 한 아파트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제품개발 설계전문회사였다.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2003년 옛 청원군 강내면에 사옥을 짓고 사업을 확대했다. 회사 이름도 JBL로 바꿨다. 친정이던 LS산전 뿐만 아니라 주요 대기업도 고객이 됐다. 자본금 300만원의 회사는 연 매출 100억원의 회사가 됐다. 그러던 중 위기가 왔다. PDP TV가 보편화되던 시기, JBL은 한 대기업과 큰 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PDP TV가격이 반토막이 됐다. 계약을 앞두고 설비도 미리 갖춰놨는데 계약은 계속 지연됐다.

50여 명의 직원 월급을 맞추기 위해 이 대표는 자신의 차까지 팔아야 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한 이 대표는 여름휴가가 끝나고 회사를 정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대표의 어려움을 눈치 챈 직원들이 더 빨랐다. 여름휴가 후 모든 직원의 사직서가 이 대표의 책상 위에 놓여졌다. ‘어떻게 성장해 온 회사인데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직원들의 뜻이었다. 15명의 직원만 남았다.

회사는 곧 정상화됐다. PDP시장이 호전되면서 보류됐던 대기업의 투자가 진행됐다. OEM으로 매출을 올리면서도 꾸준히 준비했던 JBL만의 자체개발 상품도 대박이 났다. 인도어용 골프공자동공급시스템이 성공적으로 론칭되면서 JBL은 재도약의 길에 들어섰다. 회사를 떠났던 직원들은 희망자에 한해 최우선 복직됐다. 직원들과의 협력으로 위기를 벗어난 이 대표는 나름의 경영철학을 확립하게 된다. 이후 오너에게 집중된 의사결정 권한을 직원들과 함께 하게 된다.

회사가 정상화되자 이 대표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고졸 출신이 사업가가 되면서 자신이 겪었던 경험과 어려움을 바탕으로 창업기업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사업을 구상했다. 애초 이 대표의 사업은 1인 기업형 연구소로 시작됐다. 역설적이게도 이 대표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 잊혀졌던 꿈이 다시 기억났고 JBL이 정상화되자 JBL 내에 있던 기술사업화 전담부서를 독립시켰다. 마침 JBL의 경영방식을 오너 일인체계에서 임직원 공동운영 체계로 전환시키면서 이 대표에게 꿈을 좇을 시간과 기회가 생겼다.

2012년 4월 그렇게 ㈜아이빌트세종이 첫발을 내딛었다. 아이빌트는 아이디어 빌트인의 줄임말이다. 쉽게 말해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현실화시켜주는 기업이다. 1인 연구기업으로 시작해 중견기업으로 키운 이 대표의 기업경영과 성장 노하우가 아이빌트세종을 통해 전해진다. 아이빌트세종은 현재 기술사업화, 창업 및 투자전문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중소기업청 지정 제1호 엑셀러레이터 기업이고, 지난 달 27일 ‘아이빌트 개인투자조합’이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승인 받으면서 다시 한 번 창업기업 육성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심형식 기자 letsgohs@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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