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진 목원대 교양교육원 교수
[화요글밭]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는 원래 3세기경 서진(西晉)의 진수가 지은 역사서 ‘삼국지’를 14세기 나관중이 쉽게 풀어쓴, 소설 ‘삼국지연의’를 주로 일컫는다. 중국의 위, 오, 촉나라 영웅인 조조와 손권, 유비 등이 등장하면서 천하를 다투는 내용으로 현대에까지 널리 읽히는 스테디셀러라고 할 수 있다. 고대국가의 흥망성쇠를 통해 다양한 인간군상과 처세술,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청소년들에게도 많이 권장하는 고전 명작이다.

이 소설 ‘삼국지’는 우리나라 조선 초기에 수입되어서 양반은 물론 서민들에게까지도 그 인기가 대단했다. 특히 양반들은 ‘삼국지’를 필독서로 읽었으며, 작품 내의 인물들을 평가하고 토론하고 인용하기도 하면서 교양의 척도로 삼기도 했다. 중국의 소설이지만 그 아류작이나 번안소설 등이 잇따라 나오기도 했고, 다양한 제목과 이본이 유통되었음을 볼 때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삼국지’의 내용 중 적벽대전 부분은 우리나라 판소리에 수용되어 ‘적벽가’로 재탄생하기도 하였다. 조조가 백만 대병을 이끌고 왔다가, 적벽강에서 손권,유비의 협공에 대패하고 달아나는 대목을 집중적으로 그려내었다. ‘삼국지’의 내용이 영웅들의 쟁투와 이념, 정치적 입장에서 서술된 데 비해 조선판 ‘적벽가’는 영웅들의 논리에 의해 가려져 있던 군사들의 이야기가 창작되어 삽입되었다. 또 책사 정욱을 통해 조조를 조롱하고 풍자하는 내용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서민들의 세계관이 투영된 작품으로 환골탈태 되었다.

적벽강 전투를 앞둔 전날 밤 조조의 군사들은 술과 고기를 먹으며, 전쟁터에 끌려온 각자의 사연을 서럽게 이야기 한다. 늙으신 부모님을 두고 온 군사, 장가 간 첫날 밤에 끌려온 군사, 사십이 넘어 낳은 예쁜 아들을 놓고 온 군사, 집에 두고 온 까치를 걱정하는 군사 등, 내일 있을 큰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며 각자 신세한탄이 이어진다. 군사 한명 한명이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 군사들은 보고픈 가족을 떠나 전쟁터를 떠돈 지 여러 해가 되어 전쟁에 신물 나고 조조도 믿지 못한다. 그들이 걱정하던 바처럼 조조의 군사는 고육책과 연환계 속에서 화공에 옴짝달싹 못하고 불바다가 된 적벽강에서 몰살되고 만다.

‘적벽가’는 전쟁터 속에서 죽어가는 군사들을 빠른 장단으로 어이없이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불 속에 타서 죽고, 물 속에 빠져 죽고, 총 맞아 죽고, 살 맞아 죽고, 칼에 죽고, 창에 죽고, 밟혀 죽고, 눌려 죽고, 엎어져 죽고, 자빠져 죽고, 기막혀 죽고, 숨막혀 죽고, 창 터져 죽고, 등 터져 죽고, 팔 부러져 죽고, 다리 부러져 죽고, 피 토하여 죽고, 똥 싸고 죽고, 웃다 죽고, 장담하다가 죽고, 이갈며 죽고, 죽어보느라고 죽고, 재담으로 죽고, 하 서러워 죽고, 동무 따라 죽고.

이것이 그 유명한 '죽고타령'이다. 어이없이 죽고, 죽어보느라고 죽는 전쟁터의 실상을 들으면서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그 비참한 장면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하염없이 죽는 그 군사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아들이며, 남편이며, 동무인 소중한 개인이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개인은 없고 영웅만 남으며, 승리자만이 살아 명분을 얻어간다. ‘적벽가’는 허망한 이념 속에 희생당한 군사 하나하나를 조망하면서 전쟁의 비참한 실상과 서민들의 빼앗긴 삶을 노래했던 것이다.

21세기 지구에서 아직도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전과 테러, 기아과 빈곤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아직도 전쟁위험국가에 살고 있다. 날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폭탄테러를 보고 있으며, 인근의 국가에서 위협하는 전쟁 경고를 일상으로 듣고 있다. 전쟁과 폭력의 악순환은 세기를 거듭하면서 더욱 교활하고 정교해져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국을 대리 전쟁터로 삼기도 하며, 각종 살상무기는 점차 첨단장비로 무장되고, 핵무기를 개발하는 속도도 점차 빨라지고 있다.

시리아 내전에 59발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한 미국식 패권주의에 전세계가 분노하고, 북한은 선제공격의 위협을 선포하고 있다. 누가 먼저 시작하든 그 미사일의 희생자 대다수는 민간인이 될 것이고, 폐허가 된 전쟁터는 복구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한반도에서 이런 비극이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는 눈에 힘을 주고 새로운 영웅을 뽑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 영웅은 평화에 대한 의지와 선한 능력을 가진 자로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지키며 외교, 안보를 할 줄 아는 지도자이기를 바란다. 나아가 전쟁유발자들이 사라지는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