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애 수필가
[에세이]

대지의 숨소리가 나긋나긋하다. 아니 연인의 고백처럼 달콤하다. 온 누리가 속삭여대는 원시적인 언어에 귀 기울이다 옴팡 빠져버린 오후, 솜사탕처럼 가볍고 경쾌하다.

제비꽃, 민들레, 별꽃, 현호색, 들꽃 옹알이에 취해 걷다가 그만 산모롱이 공사현장까지 가고야 말았다. 가을까지만 해도 듬성듬성 빨간 깃대가 꽂혀 있긴 했지만, 별다른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멀쩡했던 산이 반 토막으로 잘려 나가고 회색 시멘트로 덮여 있다. 자연의 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자연을 파괴하는 굉음만이 제 세상인 듯 소리 지른다. 내 귀에는 죽어가는 자연이 쏟아내는 곡성인 듯 섬뜩하기만 하다.

중구난방 불어대는 바람처럼 자연도, 사람도 질서를 잃어가고 있다. 꽃들은 갈피를 못 잡아 뒤죽박죽 꽃망울을 터뜨리다 때 아닌 싸락눈에 멍들어 버렸다. 봄이 아우성치다 간신히 햇살을 잡고 그 아픔을 어루만진다. 어쩌나, 개화의 황홀함을 누릴 사이도 없이 피다 만 꽃망울 하나가 뚝 떨어진다. 질서가 무너지면 공생의 약속도 깨어지는 법, 꽃의 절규가 계절의 어귀를 맴돈다.

온갖 것의 모태인 대지는 안타깝게도 그 역할을 잃어가고 있다. 즐겨 오르던 이곳엔 온갖 생명이 어우러져 흥겨움이 넘쳐났었는데 한 순간에 잘리고 파헤쳐져 그예 시멘트에 압사당하고 말았다. 푸른 생명 댕강댕강 잘려나간 자리에 높이 솟아오르는 고층 건물 앞에서 미아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무심천 가녘 벚꽃이 아름답다. 일시에 입을 벌려 노래하는 그들의 소리가 환상적인 오케스트라의 화음처럼 들린다. 하지만 나는 왜 그들의 노래에서 뜻 모를 아픔이 느껴지는 것일까. 꽃잎에서 눈물겨운 사연을 읽는다. 사람들은 황홀한 광경에 연방 감탄사를 내뱉으며 화무십일홍이니 즐겨보자는 단순함뿐이다. 추운 겨울을 나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독한 매연 속에서 얼마나 고초를 당하는지, 무질서의 횡포 속에서 길을 찾느라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그 모두를 다 이겨내고 숙연하게 피워낸 꽃임을 저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음주가무에 꽃을 불러들인다.

난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벚꽃에서, 잘려나간 산기슭에서, 멍든 꽃잎에서, 우리의 삶을 본다. 피멍든 꽃망울이 갈피를 못잡고 휘청대다 기어이 숨을 거두는 거리엔 그럴듯해 보이는 네온사인이 번쩍인다.

우리는 아직도 겨울 속에서 눈이 빠지게 봄을 기다리고 있다. 매서운 바람에 꽃망울조차 맺지 못한 우리에게 저들은 따뜻한 햇볕과 바람과 물을 약속하고 있지만, 얼마만큼 실현가능할지 의문이다. 부디 저 열정적인 외침이 끝까지 지켜지기를 바랄 뿐이다.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누가 다시 그 권력의 자리에 앉을지 궁금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일지가 더 궁금하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보니 투표를 앞둔 사람들이 전전긍긍 가슴앓이다. 한 길 사람 속이 열 길 우물 속 보는 것보다 어려우니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야 한다.

저들이 아무리 많은 공약을 내세워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계부채 폭증, 부동산 경기 둔화, 사드 배치로 인한 중국의 보복은 국민을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미세먼지만치나 어둡고 고통스럽다. 꽃이 피려면 먼저 동토가 해빙(解氷)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벚꽃 아래서 갖은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구름에 가려진 햇살 아래 벚꽃이 희망처럼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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