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2004년 여의도에서 박근혜와 조우했을 때) 그의 손은 차가웠다. 심줄의 악력에서 묘한 상실감마저 전이됐다. 그 냉혈은 명징한 얼굴과 전혀 섞이지 않고 따로 놀았다. 아버지의 어둠과 어머니의 절규를 닮은 듯 했다. 정확히 따지면 닮은 듯 다른 낯섦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몰락하던 당(黨)을 차가움으로 구했고, 침몰하던 세종시를 냉혹함으로 살렸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강직할 줄 알았다. 수컷답지 않은 수컷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수컷보다 잘해낼 줄 알았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청와대(푸른 집)서 끌려나와 '푸른 방(감옥)'으로 가던 그는 한없이 추한 여인일 뿐이었다. 버림받고, 버려진 그녀의 얼굴은 세파에 찌든 마귀할멈 같았다.

▶박근혜는 탄핵이전에 하야했어야 옳았다.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를 구하지 않았으니 버려졌다. 분노의 극점을 넘겨버린 것이다. 버림의 객체는 본인이 버렸던 사람들이다. 자신의 외로움을 치유하고자 남을 버렸지만, 결국 그로 인해 버려진 것이다. 그 지경이 되도록 주변에 간(諫)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뭐가 문제인지 본인이 모른다는 거다. 아마도 수의를 입고 있는 지금도, 버려진 이유를 모르고 있을 것이다. 모든 근원은 사과의 부재(不在)에서 출발했다. 사과는 반성이다. 사과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반성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더구나 진정성 없는 사과는 변명이다. 잘못을 했으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점. 사기를 쳤으면서, 오히려 큰소리를 친 점이 국민과 법을 분노케 한 것이다.

▶사과에는 반드시 1인칭 단수가 들어가야 한다. '미안하다' 한마디면 될 걸,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눙치려 드니 속이 뒤집어진다. 사과는 타이밍이다.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있을 때 해야 한다. 사과를 받아줄 생각이 없는데, 사과를 하면 앙금만 쌓인다. 여자가 남자보다 빨리 사과하는 건 잘못을 쉽게 인정해서가 아니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원해서다. 반대로 남자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건 미안하다고 여기지 않으니 사과하지 않는 것이다.

▶반장선거도 이렇게는 안할 것이다. 벚꽃경선을 거쳐 장미대선을 치르는 과정은, 벼락치기다. 60일 동안 뭘 알 수 있을까. 깜깜이 선거다.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정책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만의 리그다. 자기들끼리 표를 몰아 후보를 만들고 대통령을 만든다. 영남대통령에 지친 사람들이 호남대통령을 뽑는 것인지, 호남대통령을 뽑기 위해 영남사람을 끌어들인 것인지 한없이 비열하다. 사과하지 않는 정치인들, 사과할 줄 모르는 정치꾼들, 이번에도 뽑을 사람이 안 보인다. 왜 그들은 스스로 무덤을 팔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 한마디면 될 걸….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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