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전화가 울린다. 발신자 번호가 찍힌다. 여론조사 기관이다. '누가, 누가 좋냐'고 묻는다. 마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묻는 식이다.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불청객의 질문은 당돌하고 불손하기 그지없다. 귀찮고 짜증스럽다. 보통의 사람들은 세 가지 방법으로 응답한다. 대충 번호를 찍거나, 뚝 끊거나, 스팸 처리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사는 탁상의 수치로 끝난다. 문제는 이 엉성한 숫자가 모여 여론으로 둔갑된다는 사실이다. 부동층이나 무응답자가 40%를 넘는데도 ‘신뢰도’ 어쩌고저쩌고 한다. 사회 대중의 공통된 의견인 여론(輿論)이 몇 명의 샘플에 의해 팩트(fact)가 된다는 건 심대한 문제다. 여론은 자칫 잘못하면 바람이 된다. 바람은 치우친다. 한쪽에서 강하게 불면 바람도 휜다. 그래서 위험하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여론몰이를 했던 이들은 '의외의 결과, 대이변'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볼을 꼬집어 뜯어도 꿈이 아니라 생시였다. 유명한 리서치회사들이 큰소리 뻥뻥 쳤던 영국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EU 탈퇴) 예측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도 과녁을 한참 빗나갔다. 사실 '여론을 비켜가는 여론조사'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저가 날림조사, 의뢰자 입맛에 맞추는 편파조사의 폐해는 현재진행형이다. 더구나 질문 순서를 어떻게 배치하느냐, 질문 내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생판 달라진다. 아뿔싸다.

▶중요한 건 '주저하는(Shy) 표심'이다. 샤이 표심은 숨겨진 표, 무당층, 부동층, 선거 포기층이기도 하다. 1992년 영국 총선 때, 꺼져가던 보수당 불씨를 되살린 것도 '샤이 토리(Shy Tory)'였다. 당시 마지막 여론 조사에서 보수당이 노동당에 1% 뒤졌으나, 실제 투표 결과는 보수당이 7.6%나 높게 나왔다. 국정농단 사태로 갈 곳 잃은 한국 보수가 은근히 기대하는 이유다. 꽁꽁 숨어버린 샤이 보수가 양지로 나오면 기울어진 판을 뒤엎을만하다는 것이다. 글쎄올시다.

▶표심은 새털처럼 가볍다.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고, 예측은 거듭 수정된다. 실언 한마디에 2~5%의 지지율이 빠져나간다. 지지율 등락에 따라 돈과 사람이 밀물 썰물처럼 들락날락한다. 더구나 표심은 툭하면 변심한다. 어쩌면 여론조사 숫자가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숫자에 속는 것인지도 모른다. 후보들이 국민들 눈치를 봐야하는데, 국민들이 후보들 눈치를 보니 패착이다. 2017 대선을 대하는 제1철칙은 ‘속지’ 않는 것, 그 어떠한 것에도 ‘속지’ 않는 뱃심과 맷집이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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