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필 청주 청북교회 담임목사
[화요글밭]

'고독(孤獨)’이란 단어의 사전적인 뜻은 ‘홀로 있는 듯이 외롭고 쓸쓸함’이고, '고립(孤立)’은 ‘남과 사귀지 않거나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홀로 됨’을 의미한다. 정서적으로는 '고독'이 자발적인 외로움이라면, 고립은 타의에 의해서 따돌림을 당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을 살면서 평생 따돌림을 당하지 않도록 이웃과 좋은 유대관계나 친밀감을 갖고 살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정말 삶의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자발적인 외로움의 세계, 즉 고독의 세계로 자신을 밀어 넣어 볼 필요도 있다.

깊은 종교적 수양이나 체험을 위해서 스스로 고독한 환경을 만들어 기도할 경우가 있다. 불교에서는 겨울 3개월 동안 동안거(冬安居) 또는 설안거(雪安倨)를 하고, 한 여름에도 하안거(夏安居)를 한다. 인도 같은 경우에는 우기에 우안거(雨安居)라 하여,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수행을 목적으로 고립된 환경을 찾아간다. 인도의 힌두교 수행자들도 안거수행을 통해 고독한 세계로 들어가 자신을 수양했다.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이란 존재의 신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분주한 일상에서 물러나 기도하는 삶에 헌신한 중세의 수도자들을 '은자(隱者, anchorite)’라고 불렀다.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로 물러난다는 뜻인 그리스어 '아나코레오(anachoreo)’에서 유래한 말인데, 아마도 모든 종교에 적용해도 무방한 말이리라.

꼭 목사나 신부, 승려, 구루(힌두교의 정신적 스승이나 지도자)가 아니어도 신실한 종교적 심성을 가진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과 영적인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외딴 장소를 찾아가 고독한 환경을 만들고 기도하는 일이 잦다. 그리고 이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신앙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인생에서 만나는 고뇌의 일들, 세상을 조망하고 관조하는 일들, 시대를 읽기 위한 혜안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외로움의 자리를 찾아가는 일은 정말 소중한 일이고, 특별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일상의 관계에서 강제로 소외되는 '왕따'라는 따돌림을 당할까봐 소통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 사회관계망 서비스(SNS) 그룹방에서 강퇴(강제퇴출)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들이 아는 정보를 내가 모르고 있을까봐 두려워 지나친 검색 병에 걸려 있다. 한시라도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져 고립무원(孤立無援) 상태가 될까봐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 모임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사람들 속에 머물고 싶은 욕구는 본능적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는 점점 더 외로운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애를 쓰는 것에 비해 관계는 원활하지 않고, 소통은 어려워지고, 심각한 외로움에 지치는 세대가 요즘이 아닌가 싶다.

작금의 우리 사회와 시대는 '군중의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탄핵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보수적인 성향인지, 진보적인 성향인지, 조기대선이 이뤄진다면 어떤 후보를 지지할 것인지, 반(半) 강요에 가까운 선택지를 내밀며 답을 요구한다. 이 질문들에 대해 어떤 답을 하면 따돌림을 당하지 않고 인정을 받으며 살 수 있을까. 백 번을 생각해도 답은 없다. 이런 시기에는 군중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고독한 상태로 있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믿는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고독한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셨고,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는 홀로 고독의 자리로 가셨다. 가끔은 군중에 휩쓸리지 않아도 될 스스로 찾아갈 광야를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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