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옹산스님
[특별기고]

만공 스님이 크게 내지르는 할(喝)이라는 이 한 마디의 소리에 일본 총독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그리고 이로써 일제의 종교적 침략의 야욕은 꺾였고, 그 후로는 두 번 다시 이러한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공 스님은 그야말로 압도적이고 일방적으로 결판을 내 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통쾌하고 유쾌한 정신적 승리인가!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지로(南 次郞)와의 대결, 두 애국지사들은 무기로 상대방을 공격했고, 스님은 정신적인 법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했다.

수행 도량을 벗어난 곳에서 이처럼 위대한 법력의 힘을 발휘한 도인(道人)은 실로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희귀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세계 제국주의 침략사를 통틀어 이러한 실례는 아마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불교의 역사를 살펴 보아도 마찬가지다. 역대의 유명한 선사들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수행 도량이라는 장소 안에서 수행자들에게 이 방법을 사용하였을 따름이다. ‘할’이란 ‘너’와 ‘나’의 불교적 상호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인데, ‘할’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총독에 이것이 정통으로 먹혀 들어갔으니, 그 위력은 실로 가공할 만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만공 스님의 이례적인 행적은 한국 불교의 역사에도 반드시 기록돼 후세에 남겨야 마땅한 일이다.

식민지 침략의 역사는 동시에 종교적 침략의 역사이기도 하다. 15세기 이후 백인들이 처음 남미 대륙이나 아시아, 아프리카를 식민화할 때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신봉하는 기독교의 선교사들을 앞세웠으며, 대대적인 선교활동을 영토의 침략과 더불어 전개해 나아갔다.

과거의 모든 제국주의적 침탈이 다 이와 같은 수순은 밟았다. 일제 총독부가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와 통합시키려 했던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시도였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는 땅을 빼앗기는 일에 못지않게 정신을 빼앗기는 일에도 위기의식을 느껴야 마땅하다.

지금까지 이 이야기는 1937년 우리나라 식민지 통치의 본거지인 총독부 회의실에서 분명히 일어났던 실제 이야기이다. 꾸며내거나 과장되게 부풀린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이것은 만공 스님이 진실로 어떠한 존재였던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스님의 불교적 내공이 얼마나 어마어마했으면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감탄치 않을 수 없다.

스님이 발휘한 법력도 권총이나 폭탄과 같이 힘은 힘이라 할 수 있다. 식민지 최고 통치자를 단 한마디 말로 제압해버린 그 폭발적인 힘은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의 총과 폭탄에 못지않게 강렬했던 것이다. 요컨대 만공 스님의 법력이라는 힘을 적들에게 휘두른 항일 투사라고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너무도 불가사의하기에, 전설적인 일화로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서는 안 되며 길이 후세 사람들에게 기억돼야 마땅한 일이다. 마치 우리가 임진왜란이라는 악몽으로부터 이순신 장군을 기억함으로써 단번에 깨어나듯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라는 악몽은 만공 스님의 할(喝)! 한방으로 깨어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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