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옹산스님
[특별기고]

과거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36년간 식민지 지배를 받은 것은 그야말로 치욕적인 일로서 통탄을 금할 수 없는 뼈아픈 역사이다.

우리는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엄연한 무력적 패배와 항복의 이 역사를 상기할 때마다 의기가 꺾이고 민족적 자존심이 상함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 같은 애국지사가 없었더라면, 일제 식민지 시대의 역사는 얼마나 처참했을까? 이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목숨을 과감하게 내던져서 일제에 당당히 맞선 불굴의 독립정신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뿌듯하다.

우리는 이들의 항일 업적을 돌이켜 볼 때마다 마냥 자랑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그리고 저절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긍심이 불끈 솟아오른다. 오늘날 국가기관에서 이들의 업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기리는 것은 역사적으로 자랑스러운 이러한 업적을 길이 후손들에게 알리고, 우리 민족의 애국정신을 영구히 진작시키기 위해서이다.

일제 강점기의 항일투쟁은 거의 대부분이 무력적인 충돌의 형태를 띠었던 것이 사실이다. 무기가 아니면 몽둥이, 혹은 맨몸으로 맞서 싸웠던 것이다. 반면 그 당시 불교계에서는 주로 만해(萬海)스님이 앞장서서 사회적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만 할 일이 있으니, 산중의 수행승이었던 만공 스님이 법력(法力)으로 일제의 종교적 침략의 마수를 베어버린 일이다. 1937년 일본 총독은 전국 13명의 도지사, 그리고 전국 불교 본사 주지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고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통합하는 절차에 착수했다.

이 자리에는 식민지 통치의 총수인 일본 총독과 경무총감을 비롯해 총독부 관계부처 산하의 관리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들이 여기 참석한 스님들을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둘러싸 완전히 포위하다시피 한 형국이었고, 회의는 이들의 의도대로 일방적으로 착착 진행됐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만공 스님이 앞으로 나서 마치 수행 도량의 법상(法床)에 임한 듯 크게 ‘할(喝)!’ 하고는 주장자를 세 번 힘껏 내리쳤다. 그리고는 이러한 음모를 꾀하는 총독은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커다란 목소리로 질타하였다. 이 순간 그날의 회의는 중단되고 말았다.

이러한 만공스님의 항일 행적은 언뜻 보면 지극히 사소한 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침략의 역사를 넓은 안목으로 통틀어 보면, 이는 대단히 예외적이며,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경이롭기까지 한 일이다. 만공 스님의 이러한 항일 행동과 같은 사례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만공 스님에 대한 독립유공자로서의 평가는 일반적인 잣대로는 잴 수 없는 예외적이고 초월적인 차원의 정신적 실력행사라 할 수 있다. 일본 총독을 향해 쏘아부친 ‘할(喝)!’ 이 한마디는 광활한 허공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뇌성병력과도 같은 위력으로 장내를 한순간에 제압했다.

불교에서 할(喝)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선승(禪僧)들 사이에서 수행자의 망상이나 사견(邪見)을 꾸짖어 반성하게 할 때 내지르는 소리이다.

심오한 수행의 경지를 체득한 스승이 아랫사람을 일깨워주고자 할 때 동원되는 수단인 것이다. 이 방법 또한 아무 때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한 고비의 결정적인 순간에만 칼날같이 예리하게 내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어디까지나 선승들의 수행 도량에서만 통용되는, 다소 거칠고도 폭력적인 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할(喝)을 예사 사람이, 그리고 아무 곳에서나 섣불리 사용했다가는 크게 망신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이것이 먹혀 들어갈 것이라는 자신이 없으면 아예 꿈도 꾸어서는 안 될 일이다. 즉 상대방을 꼼짝없이 제압할 자신이 없으면 이 말은 결코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만공 스님은 이 비장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 통치의 총수에게 일타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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