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문화카페]

▲ 서울역 광장 강우규 의사 동상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1920년 11월 강우규 의사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되기 전 아들 중건에게 남긴 유언이다.

왈우(曰愚) 강우규 (姜宇奎) 의사(1855~1920). 부임하는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사 16일 만에 조선인 순사 김태석에게 체포되어(김태석은 정부수립 후 경찰서장을 지냈다)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순국한 분이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 이후 항소, 상고를 거쳐 결국 사형이 확정되었는데 이런 과정을 거친 것은 감형이 목적이 아니었다. 자신을 도와 거사를 도모한 동지들에 대해 선처를 호소하는 동시에 시간이 지나는 동안 총독척결 시도 소식이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민족자존심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키려는 깊은 뜻에서였다.

부임하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탄 마차를 향해 강우규 의사가 서울역에서 폭탄을 투척한 것은 3·1독립운동이 일어난 그해 가을, 우리나이 65세 때였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구입한 폭탄을 기저귀처럼 동여매고 선박과 기차 편으로 천신만고 서울로 반입한 과정은 영화를 능가하는 절체절명의 모험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65세면 경로우대증이 발급되는 등 노령의 길로 들어서는 문턱으로 간주하는데 100년 전, 65세라는 연령의 신체 여건과 사회적 인식, 위상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두루마기를 입은 백발노인이 허리춤에서 폭탄을 꺼내 총독이 탄 마차를 향하여 던지는 그 한 장면, 우리민족 뇌리에 길이 새길 애국애족 역사의 한 페이지를 대문자로 장식한다. 윤봉길, 이봉창 의사 등 20~30대 청년 애국지사들의 의거, 희생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65세 강우규 의사의 순국을 기억하며 옷깃을 여민다.

일부 노령층의 파행, 돌출행태와 반사회적 언행이 점차 두드러지는 이즈음 지금의 연령으로 환산하자면 80이 훨씬 넘었을 강우규 의사의 의거는 애국심과 굳은 신념, 결연한 행동은 나이와 신체여건이라는 제약을 뛰어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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