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인류는 질병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여왔다. 1348년 발생한 흑사병(페스트)은 불과 4년 만에 2500만명(유럽인구의 3분의1)을 몰살시켰다. 1918년 유럽에 퍼진 스페인독감 땐 20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1차 대전 사망자(900만명)의 3~5배가 독감으로 죽은 것이다. 우리나라도 같은 해 '무오년 독감'으로 14만명이 사망했다. 에볼라는 아프리카 콩고 북부의 작은 마을 얌바쿠를 끼고 흐르는 강 이름이다. 1976년 이 마을에 들이닥친 괴질 바이러스로 주민 모두가 눈·코·입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에볼라로 인해 2014년엔 7500명이 목숨을 잃었다.

▶1521년,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는 600명도 안 되는 군사로 500만 인구의 아즈텍왕국을 멸망시켰다. 원주민 90%가 죽었다. '황금의 제국'을 몰락시킨 무기는 총과 대포가 아니었다. 스페인군대가 옮긴 천연두(괴질)가 대량살상의 숙주였다. 일종의 '세균전'이었던 셈이다. 신대륙 발견 뒤 유럽인들에게서 퍼진 천연두(바이러스)로 10년 간 아메리카 원주민 3분의1이 죽었다. 세균전으로 세계를 정복한 인물도 있다. 칭기즈칸은 흑사병 사체(死體)를 적진에 던져 감염·몰살시키는 전략으로 악명이 높았다.

▶최근 30년 동안 전염병 20여종이 새로 나타났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AI(조류인플루엔자), 신종플루, 슈퍼박테리아(병원감염균), 에이즈 등등…. 인간의 질병 3만 가지 중 바이러스로 인한 것이 부지기수다. 에이즈로만 2300만명 넘게 숨졌다.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전염병이다. 천연두와 탄저병, 에볼라 바이러스 등이 생물테러용으로 무기화될 경우 핵폭탄의 10배 이상 파괴력을 가진다. 조류독감 바이러스 중 'H5N1'은 '인간 독감'이다. 만약 이 조류독감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감염시킬 경우, 순식간에 수백만 명이 죽을 수도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바이러스는 4000종에 달한다. 전염병이 무서운 것은 공포의 확산 때문이다. 이 공포는 일시적 패닉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치관의 붕괴, 공동체 해체, 나아가 정신적·문화적 황폐화를 초래한다. 우린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며, 얼마나 졸렬한지 학습했다.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는 패닉을 겪었다. 좀비처럼 서로의 정신을 갉아먹는 광기의 굿판이었다. 정신이 무너지면 육체는 저절로 무너진다. '소리 없는 살인병기' 바이러스가 두려운 것은 징후를 알 수 없고, 안다고 해도 대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암전이 그렇듯, 가해자가 보이지 않을 땐 더 치명적이지 않은가. 북한 핵무기가 공포의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세균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총과 대포로 싸우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이제 '육군이 깃발 꽂아야 이긴다'는 얘기는 전설이 아니라 코미디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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