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우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객원교수
[투데이포럼]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선생은(1607~1684년) 사계(沙溪)선생의 '고제3현'으로 기호유학을 대표하는 산림(山林)으로 출처대의를 분명히 밝혔던 '충청5현'으로서 조야(朝野)에 이미, 널리 알려진 경세사상가였다. 특히,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실천예학의 학문이 고명하여 일찍이 왕사(王師)의 예우를 받았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로서 벌써,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음도 쉽게 알 수 있다.

효종8년 북벌(北伐)의 부름을 받고 제진(製進)한 ‘기해봉사’는 연산군 이래, 문란해진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임란과 호란으로 쇠잔해진 국력을 부흥시켜 '국가를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자'는 취지와 방략으로 일관돼 있다. ‘기해봉사’의 서론은 역대의 치란을 개관했다. 치란은 반복되는 것으로 위기를 인식하고 때에 맞게 개혁하면 치(治 )를 이룰 수 있고 현실에 안주하여 개혁을 게을리 하면 난(亂)에 봉착한다는 것이 그 요점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설폐론(說幣論), 구폐론(舊弊論), 군덕론(君德論)으로 나뉜다. 설폐론은 당시 조선 현실을 비판적 관점에서 진단하고 당시의 국정을 '실공(實功, 진실한 노력)'이 결여되어 '실효(實效, 진실한 효과)'를 보지 못하는 상황으로 진단했다. 구폐론은 설폐론에서 지적된 폐단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책들을 제시한 것이다.

결론에서는 비상한 시국을 당하여 개혁에 임하는 통치자의 자세를 논하고 모든 것은 결국 '군주의 마음'으로 귀결된다는 맥락에서 북벌에 임하는 효종의 분발을 더욱 촉구했다.

물론, 재위 10년 만에 효종의 승하로 북벌 계획은 좌초되었지만 임병양란 이후 피폐해질 대로 필폐해진 조정에서 ‘기해봉사’를 수용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음은 조선 중기 이후 첨예한 당파싸움과 사화(士禍)를 통해서도 이미 짐작할 수 있다. ‘기해봉사’의 주요내용은 향촌의 조직과 규율, 학교교육, 인재선발, 공안(貢案)과 세제의 개혁, 전답의 측량, 관리의 승진과 퇴출, 군사조직의 훈련, 군수자금의 조달 등을 총망라한 유기적이고 종합적인 개혁책의 모색이었다. 그리고 병역과 부세(賦稅)에 있어서 모든 국민이 균등한 부담과 지배층의 부당한 특권 타파를 전격 제안했다.

아울러, 당시 현안이었던 공안문제에 대해서는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통해 공물제도 자체의 폐지를 꾀했다. 학교제도 역시, 기존 향교·사학(四學)과 성균관의 교육제도를 몽재(蒙齋), 향교와 사학 그리고 성균관의 3단계 교육제도의 개선을 제시하고 과거시험도 사서삼경뿐 아니라, 무경칠서(武經七書)를 포함시켜 활쏘기도 포함시킬 것을 주창하였다. 또한, 혁신적인 군사제도와 군수자금의 마련 등에 대해서도 그 방편을 아주 소상히 밝혀 북벌 계획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문란한 국가 기강을 바로 세우고 부국강병책으로 국력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초려선생의 ‘기해봉사’는 오늘의 현실에도 더욱 요구되며 이의 실행을 바랬던 당시 상황도 더 깊게 헤아려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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