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억수 충북시인협회 회장
[에세이]

힘찬 닭 울음에 정유년 첫날이 밝았다. 손자와 미동산 수목원에 갔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손자는 무작정 달린다. "준아 뛰지 마! 넘어져, 할아버지 손 잡고 가자." 넘어질세라 뒤쫓는 나의 숨소리가 거칠다. 어제만 해도 안아 달라, 업어 달라고 보챘다. 그런데 하루 사이에 손자의 마음이 커졌다.

미동산 수목원은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의 동쪽에 위치해 붙여진 이름이다. 안내 책자를 살펴보니 수목원체험, 목재문화체험, 산림체험교실 등 어린이를 위한 체험학습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유전자보존원, 난대식물원, 나비생태원, 다육식물원, 수생습지원 등 다양한 수목(樹木)과 식물을 관찰할 수 있게 조성돼 있다. 정이품 소나무와 망개나무 등 희귀종이 식재된 유전자보존원의 숲길을 달리는 손자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유전이란 부모가 지닌 특성이 자식에게 전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다. 미동산 유전자보존원 숲길을 뛰는 손자의 모습에서 언뜻언뜻 나의 모습이 보인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예부터 처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 했다. 나 역시 처자식 자랑에 인색하다. 왠지 낯 간지럽고 쑥스럽다. 처자식들의 자랑거리가 생겨도 드러내고 자랑하기보다는 참았다. 친구나 지인들이 손자가 자식보다 더 귀엽더라고 말하면 콧방귀로 무시했다. 손자 자랑을 하면 속으로 칠푼이라 여겼다. 친구들이 손자의 백일사진을 수첩에 넣어 다니며 자랑하면 주책없다고 여겼다. 하물며 손자 자랑하려면 돈 내놓고 하라고 하던 나다. 그런데 내가 손자 자랑에 열을 올린다. 수첩에 손자 사진을 넣어 다니며 보는 사람마다 손자 자랑을 한다. 손자가 생기기 전에는 내가 손자 자랑에 이렇게 심각할 줄 몰랐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손자를 자랑하는 것은 나의 DNA가 전달되어서가 아니다. 자식에게 다 주지 못했던 사랑을 손자를 통해 대신하려는 보상심리도 아니다. 퇴직 후 삶을 무미건조하게 보내지 말라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직장이 없으니 외출이 줄어든다. 자연히 소일거리로 손자와 지내게 된다. 손자와 함께 있으면 저절로 사랑스러운 모습에 행복해진다. 손자가 주는 기쁨을 말하고 그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손자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손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자랑은 교만이지만 손자 사랑은 기쁨이다.

손자의 행복한 웃음과 함께 유전자보존원을 둘러보고 난대식물원으로 향했다. 식물원에 들어서니 꽃향기가 상큼하다. 손자의 눈망울 가득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천천히 식물원을 둘러보며 손자에게 꽃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손자가 불쑥 "할아버지 빨리 나비 보러 가요"하며 나의 손을 이끈다. 바로 옆 나비 생태원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나비생태원에도 다양한 나비 유충 먹이의 식물들이 꽃을 피웠다. 손자는 "할아버지 나비가 없어요, 나비 어디 있어요"하며 두리번댄다.

손자에게 “나비는 대부분 겨울에는 알이나 애벌레 그리고 번데기로 잠을 잔다. 봄이 되어야 나비가 된다. 그러므로 지금은 볼 수가 없다. 봄에 다시 오자”고 했다. 옆에서 관람하던 아저씨께서 손자에게 "나비는 너야. 네가 나비야"하자 손자는 두 팔을 나풀대며 할아버지 "나는 나비다. 나비야"하며 나비 흉내를 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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