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엽의 역학이야기]

명당에 조상의 묘를 써야 부귀영화를 누린다. 묘터가 나쁘면 집안이 망한다. 우리 조상들의 생활철학으로 자리 잡았던 풍수지리학과 관련된 이런 속설은 과연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믿고 안 믿는 건 자유지만 시비를 가려보지 않고 무조건 터부시하는 건 지식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풍(風)은 바람, 수(水)는 물이다. 그런데 왜 하필 좋은 집터와 좋은 묘터를 찾는 방법을 풍수라고 하는 것일까? 좋은 집터 찾는 법, 또는 좋은 묘터 찾는 법이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물이 가면 산도 가고, 물이 머물면 산도 머문다. 물은 기(氣)를 인도하고 바람은 기를 흩어지게 한다. 물이 빠르게 흐르고 바람이 세찬 곳에는 사기(死氣)가 흐르고, 물과 산이 머물러 바람이 없는 곳에는 인간에게 유익한 생기가 모인다. 물과 바람을 위주로 인간에게 유해한 사기(死氣)를 피하고 생기(生氣)가 응결되는 명당을 찾는다고 해서 풍수(風水)라고 명명했으며, 그 원리는 손괘는 아래 있고 태괘는 위에 있는 택풍대과(澤風大過)괘에서 취했다.

이 땅에 풍수지리학이 언제부터 사용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고대 중국 복희(伏羲)씨께서 "위로는 하늘의 해·달·별을 살펴보고 아래로는 땅의 형상을 관찰"하여 음양의 이치를 밝혔다는 사실과 황제(黃帝)께서 나침반을 만들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하면 동아시아 정신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우리 조상들 역시 단군 시대 이전부터 풍수학을 사용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일본의 침략과 한맹(漢盲) 정책, 풍수 미신으로 내몰았다!

신라 말 도선 대사께서 <도선비기> 등을 남긴 이후 명당에 집을 짓고 살거나 조상의 묘를 쓰면 후손이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기복설이 기정사실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충효사상이 더해지면서 일대 중흥 기를 맞은 풍수학은 조선 태조 원년에는 칠과(七科)에 들어갔다. 초시는 관상감, 복시는 관상감과 예조에서 함께 실시됐다.

이렇게 조선 500년 내내 활용되었던 풍수학은 일본의 침략에 의한 조선의 패망과 민족정기 말살 정책으로 인해 급격한 쇄락의 길로 내몰렸고, 해방 후 시행된 한글 정책은 한맹(漢盲)을 양산해 풍수학의 몰락을 더욱 부추겼다. 결국 조상들의 유골을 편안히 모시고, 좋은 집터를 찾는데 목적이 있는 풍수학은 미신 또는 통계학으로 평가절하 되기에 이르렀다.

풍수지리학은 천체의 자전과 공전에 의해 생산되는 음양오행의 순환법칙으로 명당(吉地)과 흉지(凶地)를 가려 집을 짓고 조상의 유골을 모시는데 그 목적이 있는 자연철학이다. 어찌 이것이 통계학 내지 미신일 수 있겠는가.

기름진 땅에는 식물이 잘 자라고, 척박한 땅에는 잡초도 잘 자라지 못하는 건 진리이다. 좋은 땅을 찾는 풍수학은 인간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유익한 학문 중에 하나가 분명하다. 더욱이 약을 잘못 복용하면 그 사람만 피해를 입고, 묘를 잘못 쓰면 가문이 멸망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풍수학에 대한 연구는 깊이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

<역리학당 오원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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