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근 전 충청투데이 독자자문위원
[특별기고]

최근 발간돼 미디어공공성 언론상 등 여러 상을 수상한 ‘친일과 망각’이란 책에서는 많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행정부 공무원들은 물론 특히 경찰의 경우 80% 이상이 친일파였다고 한다. 이들은 친일행적을 감추기 위해 해방 후에는 친미세력, 반공세력으로 재빨리 변신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의 3분의 1 가량이 이른바 SKY 대학 출신이라고 밝혀냈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일제 강점기에 축적한 것으로 추정되는 토지의 불과 0.3%만이 국가에 귀속돼 매각처리됐다고 한다.

반면에 독립운동가 후손은 중졸 이하인 사람이 40%, 월소득 200만원 이하가 4분의 3에 이르는 등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누구보다도 배움의 가치를 잘 알았을 독립운동가들은 자신과 가족을 팽개치고 오직 광복만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 그 결과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구조에서 자손들은 못 배우고 헐벗게 되어 이 사회의 빈곤층 내지는 약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민족을 탄압하고 수탈했던 사람들의 후손들이 버젓이 잘 사는 슬픈 역사, 오히려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지배하는 배반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국정교과서에서도 일제 강점기 때의 독립운동사를 부정하고 친일파의 행적을 지우려는 흔적이 역력해 여론이 들끓는다. 일제강점기가 근대화에는 도움이 됐다는 역사관을 가진 인사들이 집필했다는 비판도 거세다.

그러나 어쩌랴. 70년이 지난 지금 친일파를 처벌할 방법은 없다. 선대의 잘못에 대해 후손들이 책임질 수도 없는 일이다. 봉건시대의 악습인 연좌제를 도입하자는 얘기는 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악의 고리를 언제까지나 방치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는 끊어야 한다. 어떻게 끊어야 할까?

독립선언서를 대입해 봤다. '자기를 책려하기에 급한 우리는 결코 지난 감정으로 타의 파괴에 있지 아니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우리의 신운명을 개척함이오, 불합리한 착오상태를 개선광정케 함이로다.' 그렇다. 누구를 미워하기 앞서 우리의 미래를 위해 착오된 현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친일파의 행적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후손이 지금 누구인지까지는 밝혀야 한다. 후손에 대한 처벌은 불가능하지만 진실만은 밝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도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잘못한 일, 그 진실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 등 그들에 대한 처벌만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감정에 의한 특정인 파괴가 아닌, 우리의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 중요하다. 밝혀진 진실을 통해 자신들의 부끄러운 죄악이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므로 당사자들에게는 가장 큰 처벌이 될 것이다.

최근 중국 언론에서는 우리의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서 "한국은 건국 이래 11명의 대통령이 배출됐지만 모두 안 좋은 결과를 냈다. 한국의 선거제도는 '서구식 선거의 비극'이다. 지방과 중앙 당·정의 주요직을 거친 지도자를 뽑는 중국의 정치제도가 우월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현재의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는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되든지 역시 죄악의 유혹 앞에 마주할 수밖에 없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어제의 죄악을 오늘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죄악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다'고 했다. 이러한 '개선광정'을 통해 다음 대통령이 죄악 앞에서 갈등할 때 용기를 꺾도록 하는 교훈을 주는 일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세대의 시대적 소명이요, 나라의 미래를 위한 진정한 애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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