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애 수필가
[목요세평]

한 겨울 반찬이 궁색해지면 먹으려고 잘 말려놓았던 시래기 한 다발이 실수로 물 함지에 빠지고 말았다. 얼른 건져냈지만, 이미 물에 흠뻑 젖은 시래기를 다시 건사하기는 어려워보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저녁 반찬으로 먹기로 했다.

마른 명태처럼 뻣뻣한 시래기를 물속에 두어 시간 담갔다 푹 삶아내니 그 도도함은 사라지고 나긋나긋해졌다. 시래기에 된장과 소고기, 파, 마늘, 들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버무려 멸치를 우려 낸 국물에 뭉근하게 끓여 내었다. 구수한 된장과 어우러진 시래기 향이 입에 침을 돌게 했다. 밥 한 공기를 제대로 비워냈다.

만약에 싱싱했던 무청이 마르기를 거부했다면 시래기는커녕 썩어 악취가 풍겼을 것이요, 바싹 마른 몸을 도사리고 물을 품으려 하지 않았다면 산산이 부서져 먹을 수 없는 쓰레기가 되었으리라. 아집을 내려놓아 내면은 더 충실해졌고 사랑으로 품어 안았으니 이 세태에 가장 필요한 이타심의 발로가 아닌가. 나는 한 줌의 시래기에서 비움과 채움의 진리를 여과 없이 배운다.

지금 우리나라는 산산이 부서진 시래기 꼴이다. 굵은 수레바퀴가 어이없는 장애물 앞에서 덜컥 멈춰버린 느낌이다. 위정자들은 덕을 잃고 금권(金權)에 물들어 백성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도, 사람이 마땅히 걸어야하는 바른 길도, 규범도, 통찰력도, 믿음도 잊어버렸다. 지도자와 측근들은 의무와 책임을 놓아버린 채 국정을 쓰레기로 만들어 버렸다. 억장이 무너질 일은 누구하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광장에서 촛불을 밝히고 통곡을 삼키는 저 민심 앞에서도 여야 정당과 대선주자들은 권력을 선취(先取)하기 위해 눈이 멀었다.

청렴결백을 본분으로 삼고 오로지 애국을 외쳐야 하는 그들은, 국정을 바로 잡는데 힘쓰기보다는 치부(致富)와 권력을 목표로 삼아 국민들의 선의를 농락했다. 투표용지에 힘을 실어 주며 간절했던 소망을 짓밟아 놓았다. 백이(伯夷)는 청렴한 삶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탐욕스러운 사람이라도 사욕을 삼가게 되고 아무리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라도 뜻을 세워 살게 된다고 했다. 부끄러움도 모른 채 정치판을 휘젓는 모리배 짓은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진정 국민이 원하는 것은 분노와 단죄를 넘어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제도적 장치를 보완하고 개선하는 것이다.

시래기나물 한 젓가락 입에 넣고 맛을 음미해본다. 시래기 본연의 맛은 물론 고기맛과 마늘 맛, 파와 들기름 맛이 하나하나 살아있다. 각기 다른 맛을 조합(組合) 했는데도 묘하게 어우러져 구수한 맛이 난다. 고유한 제 맛은 살아있으면서 하나로 어우러진 참맛, 이것이 진정 아름다운 조화임을 깨닫는다.

국민과 위정자가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려면 먼저 그들이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하고 치졸한 행위 또한 단연코 버려야 한다. 속속들이 드러나는 범죄 앞에서 똬리를 틀고 버틸 것이 아니라 속죄하고 민심을 따라야 한다. 이 틈을 이용해 자신의 이권을 채우려는 이들 또한, 나물의 묘미와 제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본질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오늘도 하염없이 촛불이 타오른다. 저 촛불 행렬에는 그들처럼 거짓과 위선과 사욕이 담겨있지 않다. 모두 잘 살아보자는 간절한 소망과 희망만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부디 귀가 있거든 이 엄동설한에 촛불이 타오르는 저 순수 소리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 민심은 곧 천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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