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민 ETRI 프로세서연구실 연구원
[젊은과학포럼]

컴퓨터에 대한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삼국지 무한쟁패’라는 대전 액션 게임에 관한 것이다. 검은 바탕에 이해할 수 없는 흰색 알파벳만 찍어대던 아이보리색 박스가 내가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현재 상태와 입력에 따라 출력을 내놓는 장치가 컴퓨터 CPU의 기본이 된다는 것은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그동안 CPU 프로세서 시장은 막강한 성능을 앞세운 인텔(Intel)이 장악한 컴퓨터용 CPU 프로세서 시장과 초저전력 아키텍처로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낸 암(ARM)의 모바일용 CPU 프로세서 시장으로 양분됐다.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텔 인사이드 (intel inside)’라는 문구 하나로 세계를 제패했던 인텔은 ‘모바일용 저전력 프로세서’라는 새로운 수요에 그들의 제국 일부를 내주었다.

프로세서 구조에 흥미를 느껴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하 ETRI) 프로세서 연구실에 합류했을 무렵, 스마트폰 시장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으며 모바일 프로세서 기술은 정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포화된 모바일 프로세서 기술의 다른 한편에선 사물인터넷(IoT)을 내세운 스마트홈, 자율주행과 전기차를 내세운 스마트카 시장이 태동하고 있었다. 특히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기존의 거대 자동차 제조사와 프로세서 회사들이 모두 군침 흘리는 시장으로서, 차량용 프로세서를 포함한 전장 시스템 시장 전체가 폭발적인 성장기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가정용 컴퓨터의 시대와 스마트 모바일 기기의 시대에 성장한 나는 차량용 반도체 시장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시기에 프로세서 개발자가 됐다. 마침내 프로세서 기술은 고성능의 시대를 지나 저전력의 성숙기를 거쳐 보안과 기능안전성(functional safety)이라는 문을 열어젖히며 새로운 기술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차량용 부품의 결함은 차량 탑승자의 안전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 특히 기후 등의 영향으로 동작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는 자동차에 장착된 반도체는 일반적인 환경에서 동작하는 반도체에 비해 오작동을 일으킬 확률이 매우 높다. 이러한 기능안전성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은 자동차 기능안전성 국제 표준(ISO 26262)의 제정을 촉진했으며, 기능안전성이 강조된 차량용 프로세서 시장의 수요 증가는 곧 새로운 플레이어들의 게임 참여를 자극했다.

이에 착안한 ETRI 연구진은 10년 동안의 연구 끝에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된 차량용 프로세서 ‘알데바란(Aldebaran)’을 공개했다. 알데바란 프로세서는 실시간으로 내부의 오류를 감지하고 수정할 수 있는 기능이 탑재된, 탑승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프로세서다. 프로세서 개발자들이 ‘기능이 아닌 안전’을 고려해 반도체를 설계한다는 것은 기존 개발자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다. 게다가 프로세서 설계 자체가 국내에선 활발하게 연구되지 않는 분야다 보니, 10년의 연구 기간 동안 많은 사람에게 의심과 걱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시장이 요동치며 거대 프로세서 회사들 사이에 빈틈이 생기고 있다. 그리고 이제 알데바란은 10년간의 연구를 마치고 시장에 진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 분명 프로세서 시장은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있고, 이러한 변화 속에 우리 팀에게도 기회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작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다가, 지나고 나면 ‘그 때가 엄청난 순간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10년 뒤 알데바란 프로세서가 공개된 2016년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시장의 골리앗들을 긴장케 한 새로운 도전자였을지 전환 시대의 프로세서 개발자로서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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