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문화카페]

▲ 중국 산동성에 있는 장보고 동상
국내외 정황이 어수선한 이즈음 혼란스러운 머리를 식히려 역사책을 펼쳐든다. 빠른 속도로 읽어나가다가 통일신라 후기 장보고(張保皐) 대목에 눈길이 머문다. 서술된 분량은 많지 않지만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입지와 업적, 탁월한 능력과 혜안, 결단력 같은 미덕을 포함하여 궁정갈등으로 암살되어 야심찼던 포부가 일찍 꺾이게 되기까지 저간의 상황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그려진다.

20대에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 지역에서 무령군 소장을 지냈다는 것이 공식경력의 출발이다.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더 많이 남아있는데 신라시대 많은 국민들이 당나라로 유입되어 무역상, 유학생 등과 더불어 신라방이라는 집단 거주지역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시작된 장보고의 활약은 828년 신라로 돌아와 지금의 완도지역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무역의 기점으로 삼았는데 이미 그는 상당한 부를 축적한 거상이었다. 신라-당-일본 간 다양한 루트를 통한 통상이 번성하던 시기, 청해진을 교두보로 신라인들의 안전한 무역경로를 확보할 수 있었고 해적 등 불순세력의 창궐을 막는 한편 특히 신라인들을 중국에 노비로 팔아넘기는 악행을 봉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왕의 허가를 받았다지만 청해진 대사는 기존 군사편제에 없는 독특한 호칭으로 동북아시아 해상세력 구도 재편에 기여하였다. 탁월한 리더십과 항해술과 선박건조 능력,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통해권은 우리 역사에 빛날 획을 그었지만 허약한 왕권의 잦은 교체, 장보고 권력의 비대화를 경계하는 궁정세력의 질시 속에 거짓 투항한 자객 염장에게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다. 신분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 역사 초유의 해상강국을 이룩한 장보고 사후 1200년. 우리는 아직도 바다를 온전히 장악, 활용하지 못한 채 불세출의 글로벌 리더 장보고의 활약을 되새겨야만 할까.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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