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내 이럴 줄 알았다.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했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대통령은 만사 제쳐놓고 검은 바다로 달려가야 했다. '문고리 권력 3인방'인 우병우가 지질하게 자리에 연연할 때도 단칼에 베어야했다. 최순실은 또 어떠한가. 국정을 농단하며 국민을 우롱할 때 한시라도 바삐 내쳤어야 옳았다. 그런데 항상 한발 늦었다. 아니 한참 늦게 사과했다. 곁에 있던 총리와 참모들, 장관들은 그저 '지당하십니다'만 외친 허수아비였나. 이러니 민심의 곡성(哭聲)이 더 절절한 것이다.

▶영생계·팔선녀·오방낭 같은 기상천외한 일들이 대한민국을 휘감는다. 무슨 나라가 이 지경이냐고 다들 한숨뿐이다. 선량했던 국민들 입에서도 쌍욕이 나온다. 간만에 종편(종합편성채널)만 신이 나있다. 저잣거리 아녀자에게 국가가 휘둘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대통령을 쥐락펴락하며 빼낸 돈은 국민들이 안 먹고 안 입고 아껴왔던 돈들이다. 그런데 캐면 캘수록 한없이 부끄럽다. 개인의 흉괴가 나라 전체를 능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온전히 부끄럽다.

▶몇 가지 추론을 해본다. 첫째, 최순실과 그의 패거리들이 국정농단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날로 먹은 돈을 모두 토해내는 시나리오다. 상처 받은 국민들 멘털(정신력)을 위로할 수는 없겠지만, 이는 상식선의 얘기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국민과 야당이 하야(下野)를 강권하기 전에 대통령 스스로가 권좌에서 내려오는 시나리오다. 사실상, 책임총리제는 최선책이 아니라 차선책일 뿐이다. 버티면 버틸수록 ‘누추함’의 중력은 세진다. 야당과 잠룡들이 하야를 주장하고 있지만 실상은 원치 않는 시나리오일 수도 있다. 오히려 당황할 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고집스럽게 버텨줘야 반사이익을 얻을 텐데 시작부터 김이 빠지고, 역풍도 우려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야하면 60일 내에 '반장선거'를 다시 치러야하기에 대통령 욕심을 내는 군상들에겐 시간이 빠듯하다. 셋째는 1987년처럼 데모크라시 세상이다. 거리로 나온 국민들이 촛불로 정부의 어둠을 걷어내는 굿판이다. 촛불은 저항이 아니라 울음이기에 파국(破國)의 시나리오다.

▶난세가 오자 '깜'도 안 되는 자들이 설쳐댄다. 문제의 본질은 제쳐놓고 여당은 난파선에서 엑서더스(대탈출)를 준비 중이고, 야당은 지금의 사태를 은근히 즐기는 분위기다. 국민들만 원통할 뿐이다. 청와대가 국민을 걱정해줘야 하는데, 국민이 청와대를 걱정해야할 지경이니 비통하다. 국민들보다 '최순실 왕국'의 뱃속을 채워주었다니 분통하다. 폭로와 폭거정국에 얹혀 제 잇속만 생각하는 위정자들이 넘쳐나니 이 또한 분하다. 이 비열한 가을이 버겁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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