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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최익현 선생 묘 조선말 의병장을 찾아가다

길자 http://blog.naver.com/azafarm

충청투데이 cctoday@cctoday.co.kr 2016년 10월 25일 화요일 제11면     승인시간 : 2016년 10월 24일 19시 08분
예산의 대표 관광지인 예당호, 이 큰 호수의 가장자리를 돌아 광시에서 대흥 방향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작은 유적 하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로 최익현 선생의 묘가 그것입니다. 최익현… 어디선가 들어봤던 기억이 나는 그 이름. 고등학교 시절 국사시간에 배웠는지 아니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중에 하나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최익현'이란 이름은 분명히 어디선가 들었던 이름임에 분명하였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곳은 조선 말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의병장이었던 면암 최익현 선생의 묘 입니다.

홍살문은 일반적으로 왕족의 능원 또는 향교나 서원의 입구에 세워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즉,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임과 동시에 이제 이곳에서 부터는 말에서 내려 경건한 마음가짐과 조심스런 몸짓으로 행동하라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한 개인의 묘 앞에 이런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는 것은 이 곳이 매우 상징적인 곳임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저 역시 '현대인의 말'이라 할 수 있는 자동차를 홍살문 앞에 세운 후 경건한 마음으로 홍살문 안으로 들어섭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른 재정 파탄 등을 들어 상소를 올렸고 이에 관직을 삭탈당하게 됩니다. 이후에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고 합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을사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맞서 싸웠지만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 되었고 결국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최익현 선생에 대해 자료 조사를 하면서 솔직히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거대한 권력인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측근 들에 맞서 싸우다 관직에서 삭탈되고 제주도와 흑산도 유배길에 올랐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불의에 맞서는 모습, '조선말기에 이런 거대한 의인이 있었다니~!!'하는 생각이 들었고 대마도 유배 당시 적(일제)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하여 단식하다 끝내 세상을 떠났던 모습 등을 통해 그의 높은 기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최익현 선생의 묘는 1907년 논산군 상월면에 세워졌으나 참배객이 많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멀리 떨어지 이곳 예산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일제는 그의 기상이 후대로 전해지는 것이 두려웠을 것 입니다. 하지만 그의 높은 기상은 후대로 전해져 이후 항일독립운동의 씨앗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익현 선생의 묘가 논산에서 예산으로 옮기게 되면서 특이하게도 민가를 재실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묘 아래쪽에는 멋스런 한옥 두채가 놓여져 있는데 바로 이곳이 재실로 사용되어지던 곳이라고 합니다. 선생의 위패와 영정은 현재 청양군에 위치한 모덕사에 모셔져 있는 상태이며 이곳 모덕사에는 위패와 영정 이외에도 선생의 유품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니 시간이 되면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익현 선생의 묘 앞에는 이렇게도 화사한 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갈망했던 그의 숭고한 마음이 마치 꽃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정권이 부패하고 외세의 침입에 힘 없이 당하던 조선말,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버겁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불의에 맞서 싸우는 항일정신 만큼은 사그러들지 않고 더욱 불을 지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 입니다. 지금의 국제 정세는 마치 조선말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의 정신이 다시금 되새겨져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요? (이 글은 09월 24일에 작성됐습니다-이 사업(기사)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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