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전자분야 송명규 교수
軍제대 이후 기술인의 길 걸어
전자분야 기능장 등 인정 받아
“돈없는 기업에 단비같은 존재”

▲ 돈이 없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금은 가장 각광받는 위치에 선 송명규 산업현장 교수. 김영준 기자
기술을 업으로 삼게 된 이유는 ‘돈이 없어서’였다. 찢어지는 가난에 대학교 합격 통지서도 함께 찢어버려야 했다. 남들보다 낮은 곳에 머문다고 여긴 삶이었지만 지금은 사람 위에 사람은 없다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지난해에는 노동부장관상 수상과 우수산업현장 교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고 현재 명장심사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체득한 기술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송명규(47) 산업현장 교수의 이야기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송 교수의 삶은 막막했다. 기술학원을 전전하며 닥치는데로 기술을 익혔고 낮에는 학습지 세일즈맨으로 일하며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입대 전 대전에서 전자통신분야 기술학원을 다녔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번듯한 직장인 ‘한국통신(현 KT)’에 입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본격적인 기술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제대 후 인천의 ‘팔봉전산직업훈련원’을 다니면서부터다. 뛰어난 기술인이자 은사인 원진철 선생님(현 산업현장교수)의 가르침 탓이었다. 새벽 인력시장과 공사장을 전전하면서도 훈련원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다.

송 교수는 “먹던 빵에 눈물이 떨어지는 게 예삿일이던 시절”이라며 “그 때 원진철 교수님이 ‘엔지니어의 길을 걸으라’고 독려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갈고 닦은 기술은 1992년 대전의 ‘원다레이저’에 연구원으로 입사하면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후 회사를 옮겨 한국표준과학연구원과 ‘광계측기’를 만들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광통신망 초기개발 사업에 주축으로 참여하는 등 다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30대 초반에는 누구나 이름은 들어봤을 ‘미건의료기’ 연구소장으로 부임하기도 했다. 당시 전자분야 기능장과 숙련기능인, 우수기능인으로 인정을 받았고,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참여해 전국 4위(장려상)의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폴리텍 대학과 한밭대학교에 진학해 석·박사 학위를 따게 되는 첫 학업의 여정도 이때 쯤 시작됐다. 뛰어난 위상과 경력에 따라 그를 교수로 모시려는 곳도 생겨났다. 2005년 처음 ‘마이크로 프로세스’를 강의한 후 현재 폴리텍 대학과 한밭대에 출강 중이다.

산업현장 교수로는 2012년부터 전기전자 분야 ‘1기’로 활동하고 있다. 전국의 기업과 학교에서 교육 받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그는 지난해에만 15곳에서 강의를 진행했다. 뛰어난 실력도 실력이지만,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도 송 교수가 각광받는 이유다.

“2013년 동아마이스터고에서 학생들의 프로젝트 발표 지도를 맡았는데, 1주일 동안 학교에서 숙식하며 결국 교내 금상을 따냈어요. 학생들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눴죠.”

‘일학습병행제’와 ‘NCS(국가직무능력표준)’ 컨설팅도 겸하고 있는 그는 더욱 많은 지역 기업들이 산업현장 교수의 도움을 구하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는 “산업현장 교수제도는 활동비용을 산업인력공단에서 지원한다”며 “돈이 없어 전문가·강사를 쓰지 못하는 기업과 학교에 단비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김영준 기자 kyj85@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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