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속 사연]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그는 속내를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늘 온갖 변명을 들이대며 위기상황을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늦은 것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가당치 않다." 자신이 처하거나 저지른 상황이나 불합리성을 애써 감추려 하는 시도다. 진실을 숨긴 채 구실과 핑계를 둘러대 정당치 못한 것을 정당화하는 모습이다.

원래 변명은 이런 뜻이 아니었다. 참되고 거짓됨을 가릴 '변(辨)'과 어둠 속에 있는 것들을 낱낱이 드러내 밝힐 '명(明)'으로 구성된 한자어다. 진실과 사실에 의거해 잘잘못을 가려 사리(事理)를 밝히는 것이 바로 변명이다. 그러니까 변명은 자신의 견해나 신념을 피력해 상대방을 설득이나 이해시키는 행위이다. 이처럼 변명의 탄생 이유는 긍정성에 있다.

그러나 부정성 의미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왜 그럴까. 단어의 외연(外延)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주관성과 자기 합리화의 근본적 특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속성에 근거한다. 법정에서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듯이 자기 정당화와 주관성 역시 인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 행위는 자기 합리화에 따른 미봉책이 따를 개연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 미봉책이 진실과 사실을 왜곡시킨다. 진실과 사실을 말하는 대신 발생한 결과가 합당하다고 슬그머니 우기거나 그럴싸한 증거를 제시한다. 비판, 비난을 일시적으로 벗어나기 위한 술수다. 변명의 결과는 화자(話者)에게는 합당하지만 상대방에게는 대부분 부당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변명'은 진실을 말하는 변명일까, 아니면 자기 정당화를 위한 구실일까.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혐의들이 진실과 사실에 어긋남을 지적한 것으로 보아 진실을 말하는 변명이다. 이 변명이 오히려 구실과 핑계로 받아들여져 독약을 마셔야 했다. 부정성의 '변명'을 옆에 끼고 사는 인간들이 참 많다. 정치인들. 툭하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변명을 늘어놓는다. 변명의 대가(大家)다. 참된 변명을 되찾는 정치인들을 기대하는 것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기대한 것이 정말 더 나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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