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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레스토랑. 요즘에는 촌스러운 장소로 인식되는 감이 없진 않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이 곳에서 식사를 하는 일은 꽤나 힙한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어느 매장으로 가든 20~30분 정도 대기하는 일은 기본일 정도로 패밀리 레스토랑의 인기는 대단했었다. 아웃백, 빕스, TGI프라이데이 등 다양한 패밀리 레스토랑이 경쟁을 벌였는데, 그중에서 나는 빕스를 가장 좋아했다. 이유는 단 하나, 훈제연어 때문이었다.

내가 훈제연어를 처음 접한 것은 20대 초반에 여자친구와 함께 빕스에 들렀을 때였다. 나는 매장 내 다양한 먹거리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훈제연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분명히 회 같긴 한데, 그동안 먹어온 회와는 다르게 생긴 비주얼이 내 흥미를 끌었다. 자리로 훈제연어 몇 조각을 가져와 입에 넣어 오물거리는 순간, 나는 새로운 맛의 세계에 눈을 떴다. 짭조름하면서도 기름진 풍부한 감칠맛. 그동안 먹어왔던 생선회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맛이었다. 이 안주에 곁들일 소주가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날 나는 이날 아니면 언제 또 먹어보느냐는 심정으로 훈제연어만 몇 접시를 가져다 게걸스럽게 먹었다. 결국 배탈이 났지만 말이다.

알고 보니 훈제연어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만 접할 수 있는 안주가 아니었다. 훈제연어는 대형마트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안주였다.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이 곧 쉽게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훈제연어는 대형마트에서도 꽤 비싼 축에 드는 안주였다. 20대 초중반 대학생의 주머니 사정은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머릿속에선 훈제연어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 싶다는 욕망이 점점 커져갔다.

간절했던 욕망은 조금 부끄럽게 실현됐다. 돈을 모아 여자친구와 함께 빕스에 다시 입성한 나는 비장한 심정으로 가방에서 물병을 꺼냈다. 물병에는 소주가 들어있었다. 잔에 담긴 물을 모두 마셔서 비운 나는 그 잔에 물병에 든 소주를 채웠다. 잔 옆에 훈제연어가 가득 담긴 접시가 놓였다. 미지근해진 소주는 비렸다. 그 비린 소주에 젖은 혀를 덮은 훈제연어의 맛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소주를 밀반입했다는 죄책감은 곧바로 사라졌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욕망의 불꽃은 한 번 꺼트린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훈제연어를 먹고 온 다음 날이면, 전날에 배가 불러 도저히 먹을 수 없어 두고 온 훈제연어가 눈앞에 하루종일 아른거렸다. 그렇다고 비싼 패밀리 레스토랑에 자주 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과외 등 아르바이트로 돈이 생기는 날이면, 반드시 대형마트에 들러 훈제연어를 구입했다. 어쩌다 '1+1'으로 묶어서 훈제연어를 파는 날은 계를 탄 날이나 다름없었다. 훈제연어를 사들고 좁은 고시원 방으로 돌아가는 저녁은 행복했다.

대형마트에서 파는 훈제연어는 보통 200~300g 단위로 포장돼 있으며, 가격은 1만원 내외였다. 비싸지만 배불리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고시원 방 책상에 앉은 나는 고민 끝에 훈제연어를 최대한 오래 먹기 위해 여러 조각으로 나눴다. 돌이켜보면 우스우면서도 애잔한 풍경이다.

어떤 것을 곁들여 먹으면 좋을까 고민하던 나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최적의 곁들임 음식을 찾았다. 바로 날치알이었다. 훈제연어로 날치알을 싸서 먹으면 식감뿐만 아니라 맛도 좋아졌다. 훈제연어가 다른 회와 비교해 가장 부족한 점은 식감이다. 입안에서 훈제연어와 뒤섞인 날치알은 씹을 때마다 식감을 더하는 한편 감칠맛도 보탰다. 이 조합으로 지금까지 비운 소주병이 얼마나 되는지 셀 수가 없다.

훈제연어의 맛을 더하는 것은 인내이다. 훈제연어는 대부분 냉동상태로 유통되기 때문에 먹으려면 해동을 해야 한다. 이 해동과정이 연어의 맛을 좌우한다. 처음에는 그저 먹고 싶은 마음이 급해 흐르는 물에 훈제연어를 포장된 상태 그대로 담가두거나, 전자레인지의 해동기능을 이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훈제연어를 실수로 냉동실이 아닌 냉장실에 보관했다가 새로운 발견을 했다. 냉장실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해동시킨 연어의 맛이 훨씬 좋았던 것이다. 흐르는 물에 단시간에 해동시킨 훈제연어는 살이 많이 물러지곤 했는데, 냉장실에서 자연해동을 시킨 훈제연어는 그렇지 않았다. 기다림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은 순간이었다.

요즘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소주를 들고 가는 진상을 부리는 일도 없고, 20대 때처럼 대형마트에서 훈제연어의 가격을 보고 벌벌 떠는 일도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훈제연어를 한꺼번에 여러 개씩 구입하는 일이 없고, 여러 조각으로 나눠서 천천히 먹는 일도 멈추지 않고 있다. 역시 맛있는 안주는 아쉬움이 남을 만큼만 먹어야 더 맛있는 것 같다. 오래전 고시원 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글은 7월 31일에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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